철학

간디의 인생과 명언

지적허영 2023.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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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흐마트 간디의 진리에 탐구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는 인도의 무 저항주의 정치가로 유명하다. 탁월한 영도력을 가진 빈틈없는 현실정치가 (現實政治家)인 동시에 국민회의파 지도자였던 그는 인종 차별 법령 철폐에 노력하였고, 무저항·불복종·비협동주의 등 특이한 투쟁 방법으로 인도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2차 대전 후 통일 인도의 재건에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암살당한 간디의 일생은 조국의 독립을 위한 것이었다.탄압과 압박에 굴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했으니, 그는 조국의 독립을 마치 진리를 탐구하듯 진지한 마음으로 일관하여 갔다.

 

「진리에 대한 신앙이 있어야만 우리들의 존재에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진리는 인간 활동의 중심이며 생명이다. 수행자가 만일 이 신앙에 도달하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서도 인생에 있어서의 모든 규범을 발견하게 되며 자연히 그 규범에 따르게 마련이다. 진리를 알지 못하고서는 어떠한 원칙이나 규범을 인식할 수 없다」

 

이는《수행단에 부치는 글의 일부로 그의 신념이 어디서부터 발로되고 있는가를 알려 주고 있다. 그것은 진리 탐구 바로 그것이며 참다운 진리를 그는 인간 활동의 중심으로 또한 생명으로 삼았다. 이것이 간디의 생활 신조였고 철학 사상이었다. 그는 조국 인도의 독립을 위한 방법의 하나로서 비폭력으로서의 무저항주의를 택했다.

비폭력주의자 마흐마트 간디의 철학

이에 간디가 내세운 비폭력의 내용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나는 믿는다. 비폭력은 폭력보다도 훨씬 훌륭하며 부드럽게 용서하는 것은 처벌하는 것보다 훨씬 사내답다. 부드럽게 용서하는 것은 무사에게 빛나는 영광을 안겨 준다. 처벌할 수 있는 힘이 있을지라도 폭력을 쓰지 않는 것이 부드럽게 용서하는 것이다. 무력한 존재에서 나온 것처럼 보일 때에는 아무 의의가 없는 것이다. 힘은 결코 육체적 능력으로부터 나온 것이 이니다. 비폭력이란 악을 행하는 사람의 의지에 무력하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자의 의지에 대해서 목숨을 내던지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정치 이념을 밝힌 강연의 일부이다.비폭력은 비록 무기를 사용하는 폭력은 아닐지언정 눈에 보이지 않는 무서운 무기와 같은 힘임을 인지케 한다. 본래 폭력은 야만적인 소행 바로 그것이었다. 인도주의적인 인간에의 행동이 아니라 육체적 힘으로 인간성을 지배하려는 야만적인 행위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간디는 이 인도주의적인 비폭력에 의한 방법으로 독립을 호소했고 전취(戰取)하려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세계 인류사는 자기 민족의 생존을 위해 폭력주의라는 무기를 사용, 약육강식의 싸움을 다반사로 여겨왔다. 폭력으로 인한 생존권의 쟁탈 바로 이것이 인류사의 발전 과정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먼 예를 들 것도없이 1차 세계 대전만 하더라도 바로 그런 싸움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간디는 비폭력주의의 폭력으로서 독립을 전취했다. 일찌기 세계사에 없는 무저항주의로써의 독립 전취였으니, 이는 약소 민족이 강자에 대해 취하는 새로운 투쟁방법이었다. 또 그것은 평화 정신에서 비롯된 가장 인간적인 행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실천한 자가 바로 인도의간디였다.

무저항주의자 마흐마트 간디의 종교와 정치

「보편적이면서 어디에나 가득차 있는 진리에 도달하려면 아주 보잘것 없는 천한 모든 존재들도 곧 자기 자신처럼 생각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그것을 지향(志向)하는 사람은 인생의 어떠한 분야에서도 빠져 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그러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나의 헌신이 나를 정치 분야에 끌어들인 것이다. 털끝만큼의 주저도 없이 그러면서도 겸허한 마음으로 나는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다. "종교가 정치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실제로 종교가 어떤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자이다"라고.」

 

이 말은 그의 저서 《나의 진리의 실험》에서 밝힌 일부이다. 간디의 정치 이념은 종교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가난한 사람을 곧 자기 존재로 생각하고 사랑할 것을 그 목표로 삼는다. 이것은 또한 간디의 정치 목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헌신이 그로 하여금 정치에 눈을 뜨게 했고 겸허한 마음으로 이를 실천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점에서 간디는 종교와 정치를 동일시했고 일찌기 볼 수 없는 그 나름대로의 정치 이념을 실천기에 이른 것이다.

 

 

이의 실천을 위한 첫 단계로서 간디는 자기의 정화(淨化)를 부르짖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물과 한몸이 될 것을 요구했으며 그런 정화가 없는 한 비폭력의 법을 받들어 행한다는 것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파했다. 그래서 비폭력에의 무저항주의의 실천은 바로 자기 정화로부터 출발함을 인지케 한다. 간디에 의하면 속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은 신을 체험할 수가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자기 정화라고 하는 것은 인생의 모든 직업에 있어서의 정화를 의미한다. 소리없는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하고 그 양심의 소리는 자기 정화에의 지름길이 된다. 그래서 양심의 소리는 자기 정화에의 근원을 이룬다. 간디의 말을 빌면 〈정화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비상한 영향력이 있는 것이므로 자기 자신을 정화한다는 것은 즉 자기 주위를 정화하는 것이 된다〉고 하듯 나의 정화는 곧 나의 주위를 정화하기에 이른다. 그러고 보면 비폭력에 의한 무저항주의는 자기정화를 이념으로 한다. 정화란 한 마디로 깨끗하게 하는 것이고 양심의 가책이 없는 올바른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종교적 양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어야 한다. 그러지 않는 한 정치는 타인의 이익(他利)을 위한다기 보다는 자기자신의 이익(自利)에 사로잡히기 쉽다. 이런 정치 철학을 바탕으로 조국의 독립을 쟁취한 간디는 인도 독립의 아버지로서 추앙받아 왔다.

 

1914년 이래 국민회의파의 지도자로서 흉한의 총탄에 쓰러질 때까지 인도 민족을 위해서 활동해온 그는 진리를 탐구한다는 정신으로 폭력을 부정하고 비폭력에 의하여 그 목적을 달성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평화적인 수단으로 영국의 압박으 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던 것이다. 영국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전개하면서 농촌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가공업을 일으켰고 그 운동으로써 민족 자본의 축적을 지향했다. 또한 이미 말한 바와같이 종교를 정치에 구현시키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이러한 일련의 그의 정치 사상을 우리는그의 저서 《나의 진리의 실험 (자서전)》 《평화와 전쟁에 있어서의 비폭력》《진리의 파괴》등에서 볼 수 있다.

마흐마트 간디 사상의 요체

간디의 사상의 핵심은 바이슈나바 파(派) 교의에 바탕을 둔 신의 사상이었다. 바이슈나바 파는 11세기 남인도에서 태어난 바라문의 라마뉴쟈 철학에 의해 처음으로 지성적으로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힌두교의 유력한 일파로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간디는 인도 대중에게 있어서는 바구리(바이슈나바 파)의 성자위대한 혼(마하트마)이며 지금까지도 성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정치 이론을 비판하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경제 사상도 또한 미묘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그러나 그의 금욕주의는 엄격한 것이었다. 가령 다음과 같은 말은 현대인들에게 있어 불가해한 견해로밖에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인도는 인구는 많은데 경제적으로는 궁핍하다. 가족 계획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떠한 결혼도 자손을 얻으려는 마음이 없을 때는 죄악이고, 인공적인 산아제한은 신체를 허약하게 하거나 신경쇠약을 일으킨다. 자기 행위의 결과를 회피하는 것은 부정이고 비도덕이다」

 

간디는 자기의 육체적 욕구를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절시켰고 항상 엄격한 채식주의자였다. 그의 옷은 매우 남루했으며 노출에 가까왔다. 노년에 접어들면서 그것은 더욱 심했고 1911년경부터는 노출된 부분이 옷으로 가린 부분보다 더많았다. 적극적으로 무소유(無所有)를 추구한 결과 그는 점점 처칠이 말한 바와 같이〈거지의 성자〉가 되어 갔다. 이 간디가 불타 이래 그 누구보다도 인도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엎드려 그의 손발을 잡으면서 자기들의 마음을 씻었고 또 그로부터 신의 축복을 얻으려 했다. 만일 손발을 잡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축복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 때문에 수십만의 인파가 정류장에 운집했고 또 연설장으로 모여들었다. 그의 존재는 많은사람들의 피로한 얼굴에 빛을 주었다. 이러한 그는 약 30년에 걸쳐 낡은 전통에 사로잡힌 인도의 표정을 바꾸어 놓았다. 즉 적정(寂靜)주의적인 것에서 활동적인 모습으로 변모시켜 놓았다. 그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소년시대(少年時代)로부터의 덕성(德性)

그 비밀의 하나는 방금 말한 바와 같이 바이슈나바파(派) 신자였다는 사실이다. 간디는 억눌린 생활을 한 뒤부터 정치운동에 뛰어들었는데 본질적으로 사람들로부터 신을 따르는 인물이라고 인정받은 데서 많은 추종자를 갖게 되었다. 그의 소년시대의 생활에서는 뒤에 그가 이룰 수있었던 초인적으로 놀랄 만한 모습을 약속한 바의 언행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바이슈나바 파의 교리에 따라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의무적인 헌신과 성실로써 남의 결점을 보려고 하지 않는 이른바 덕성스런 소년이었다. 이런 덕성이 나이가 들면서부터 밖으로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의무적인 헌신은 인간성에 대한 헌신이 되었고, 성실은 진실을 탐구하는 것이 되었다. 또 남의 결점을 들추지 않는 성질은 관용과 공정성으로 변하여 사람의 죄악을 책망하기는 하나 인간 자체를 탓하지 않는 성질로 발전하여 갔다. 

 

간디의 기본적인 신조는 바이슈나바 파의 교의(敎義)대로 이 세계에 충만해 있는 정신이 신의 실재를 믿고 인간의 능력을 믿는 일이었다(간디는 이것을 신을 뽑는 것이라고 말했다). 간디는 자기를 통해서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존재를 신에게 증명했고 정치적인 운동을 포함하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런데 간디는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힌두교 정통파처럼 사원(寺院)에의 도피나 동굴에의 고독이나 어마어마한 예식 속에서 구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또 요가의 행위로 알려진 정신통일을 위한 육체의 훈련이라고 하는 인도의 전통적인 도(道)로도 행하지 않았다. 간디가 구한 것은 오직 인간에의 신을 구하는 데 있었다. 또한 간디는 인간에 대한 진리를 구함에 있어 동포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 특히 사회 최하층 사람들에 대한 봉사를 통해서 구하려고 했다. 이는 그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이기도 하다.

 

간디는 무엇인가 의문이 생겼을 때는 스스로 자아 즉 양심의 소리를 들으려고 했다. 이 양심의 내심의 소리에 이끌려 생애를 통해 두 번에 걸쳐 결사적인 단식을 행했다. 하나는 1933년 9월 천민에 대한 영국 정부의 차별 대우에 반대하여, 또 1939년 3월 인민을 학대한 고향 라지코트의 토후(土侯)에 반대하여 행한 것이다. 또 간디는 일생 동안 3회에 걸쳐 반영(反英) 비복종 운동을 일으켰다. 이 3회 모두 간디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지만 어느 것이나 내심의 소리에 따라 행한 것이었다고 간디 자신은 말하고있다. 이처럼 간디는 신을 구하는 곳이 크면 클수록 간디의 눈은 비참한 생활을 하는 인도 대중에게집중되었고, 그리하여 인도의 천민들의 벗이 되었다. 간디는 옛 인도의 현자와 같이 요가의 행자(行者)와는 달리 국민에게 행복을 주는 가장 활동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독특한 모습의 혁명가였다.

네루는 그의 저서 《인도의 발견》속에서 간디를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그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는 다면적인 성격 중에서도 가장 강한 인상은 대중과의 일체화였고 대중과의 정신적 통합이었고 인도뿐만 아니라 세계 속의 무산자, 곤궁자와의 놀랄 만한 일치의 관념을 갖게 했다」 이 한 마디로 간디의 인품과 생활 태도가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마흐마트 간디 사상을 이어받은 네루

네루는 간디의 후계자였다. 1948년 1월 30일 암살자의 손에 의해 최후의 생애를 마칠 때 간디의 나이는 78세였다. 이 혁명가의 정치 사상을 이어받은 네루는 인도 수상이 되면서 인도의 대사상가가 되어 빈곤 일에 앞장 섰다. 이 빈곤 퇴치 운동은 간디의 염원이기도 하였다. 이를 실천한 네루는 권력을 행사하면서 그 자신이 만든 인도국가 계획위원회로부터〈20세기가 끝나기 전에는 빈곤은 추방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고 대책을 강구하던 1964년 5월 27일 격무속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간디나 네루는 종교의 나라 인도, 궁핍한 농민의 나라 인도를 그의 정신적 대지로 삼았다. 그들은 만사를 이 일에서부터 시작했다. 간디가 태어났을 때, 인도는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동서 인도 해안에는 영국 상인의 요새가 구축되어 있었고 영국풍의 도시가 발달하고 있었다. 이런 도시에 인도, 영국 상인들이 들끓고 있는 인도에 간디는 조금도 애착을 느끼지 못했다. 간디는 18세 때 변호사가 되기 위해 영국으로건너갔다. 그는 변호사가 된 후에도 인도를 잊지 않았다. 인도의 성전(聖典)으로 일반 대중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비시누 신의 가르침, 즉 모든 것에 대한 진실과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잊은 일이 없었다. 그것은 간디 가(家)의 종지(宗旨)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1893년 남아프리카에 갔을 때 일대 회심(回心)이 간디에게 일어났다. 그 이래 유럽 문명에 대한 동경을 버리고 인도의 전통적인 문명으로 돌아간 간디는 진실과 사랑에 관한 인도의 전통적인 가르침이 진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먼저 자신을 실험대에 바쳤고, 마침내 성공하자 인도인 전체를 위해 생애를 바쳤다.

 

네루가 간디를 처음 만난 것은 1916년 말경이었다. 당시 네루에게 있어서 간디는 별세계 사람처럼 여겨졌고, 정치 운동가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네루가 27세 때, 간디는 47세였다. 네루는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서 간디가 진정한 지도자임을 발견하였고, 그리하여 간디의 지도 노선에 따르게 되었다. 스스로 이교도라고 자처한 네루의 그 후의 인생은 실로 격동과 폭풍의 인생이었다. 활동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안식처였다. 간디를 발견한 네루는 안일을 구하는 탕아의 경지에서 벗어나 활동 속에서 만족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그에게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간디의 비밀의 힘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네루는 오직 간디의 위대함에 도달했을 뿐, 간디의 이성적인 소리를 통해 마음의 충실을 찾는 것이 고작이었다. 간디는 네루와 같이 도시에서 성장한 지식인들을 향해 농촌에 갈 것을 하나의 의무처럼 호소했다. 간디는 인도의 독립 운동의 중심 세력으로서 농민을 끌어들인 최초의 지도자였다. 간디의 이 외침에 적극적으로 반응을 보인 것이 바로 네루였다. 이것이 뒤에 인도 독립운동사를 장식함에 있어 네루가 간디를 인도의 위대한 지도자로 삼은 이유가되었다.

 

간디와 네루 사이에는 빈농국인 인도에 대해 사고방식이나 태도에 있어 차이가 있었다. 간디는 농민 속에서 신을 보고 예배했으며 네루는 농민의 표정에 동조하고 감동하며 농민과 일체가 되려 했다. 그러나 네루는 간디가 찬미할 만큼 중시했던 빈농 생활에 조금도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네루는 농민을 단순하고 무지하며 궁핍한 생활에서 끌어올려 도시와 같은 문화 생활을 영위하도록 하는데 노력했다. 그를 위해 네루는 생산을 증가시키고 공업화를 이룩하는 것이 빈곤과 실업을 막는 길이라고 확신했다. 이에 네루는 1949년 회의파가 정권을 잡았을 때 아시아 여러 나라에 앞서 5개년 경제계획을 1951년부터 실시하려 했으니 네루야말로 인도의 공업화를 위해 생애를 바친 유일한 정치가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모두 다 인도의 독립을 위해 생애를 바쳤다. 간디로부터 감화를 받은 네루는 비록 정치 이념을 실현함에 있어 견해의 차이는 없지 않았으나 조국 인도 건설이라는 점에서는 공통 분모를 이루어 왔다. 간디는 반드시 새벽 세시나 네 시경에 일어나 기도를 올렸고 기도가 끝나면 독서와 집필을 했다. 아침 식사 전 두 시간 정도는 반드시 이 일에 전념했다. 그 후 아침 식사를 들었는데 그는 아침 식사로 땅콩, 주먹만한 과일과 쌀밥을 들었고, 소금이나 조미료를 일체 넣지 않았다. 점심은 굶었고 저녁은 과일과 그 밖에 계절에 따른 것을 들었으며, 식사 전 오후 다섯 시경에는 꼭 기도를 올렸다. 저녁 식사 후에는 신문을 읽었으며, 오후 여섯 시 반에서 일곱 시까지는 마일 가량의 산책을 하면서 대중들과 회담했다. 그리고 오후 아홉시에서 열시 사이에 취침을 했는데 바로 이것이 간디의 일과였다. 네루의 생활 또한 간디와 별 차이가 없었다. 식사와 취침 시간을 제외하곤 거의 국사에 전념했고 나라 사랑의 충정으로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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