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감자 (1925)김동인(金東仁)(1900~1951)

지적허영 2023.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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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1919년 주요한(朱耀翰)(1900~1979) 등과 함께 동경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 동인지(同人誌) 《창조》를 간행한 후 귀국했다. 1925년 무렵 방탕한 생활로 파산하고 이혼 하면서 생계가 곤란해졌고, 끝내 아편에까지 손을 댄다. 한국 전쟁 때 병약(病弱)해 피난을 가지 못한 채 자택에서 사망했다.

 

세상 물정도 모르고 교육도 받지 못해 가치관조차 없던 15세의 복녀는 80원에 35세의 홀아비에게 팔려간다. 그러나 복녀의 남편은 너무도 게을러 마을에서도 인심을 잃었고, 결혼 후 3~4년이 지나면서 장인어른에게조차 미움을 받기 시작한다.그러다 그들이 흘러 들어간 곳은 세상의 모든 비극과 범죄의 근원지인 평양 칠성문(七星門) 밖 빈민굴이었다. (고조선의 왕조 중 하나인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운) 기자묘(箕子墓) 솔밭에 송충이가 들끓자, 평양시에서는 칠성문 밖 빈민굴 여인들을 인부로 고용한다. 어느 날 감독관이 복녀를 따로 불러내 재미를 본 후부터, 복녀는 일하지 않고도 임금을 더 받는 사람들 축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복녀는 (일종의 가치관 형성이긴 하지만) 어떻게 해야 세상을 편하게 살 수 있는지를 (머리가 아닌) 몸으로 먼저 느끼기 시작한다. 1년 후엔 의도적으로 돈 좀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 접근해 몸을 판 돈으로 생활하기까지한다. 죄책감 같은 건 없었다. 자기처럼 가난한 여성은 응당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가을이면 빈민굴 여인들은 칠성문 밖에 있는 중국인 왕서방의 채마(菜麻)[채소] 밭에 몰래 들어가 감자며 배추 따위를 서리하곤 했다. 복녀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왕서방에게 붙잡혔지만, 오히려 몸을 주고 돈까지 받는다.

그 후로 왕서방은 수시로 복녀를 찾아왔고, 그러면 복녀의 남편은 자리를 비켜줬으며, 왕서방이 간 후엔 그에게 받은 돈을 세면서 복녀 부부는 즐거워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왕서방은 돈을 주고 처녀 한 명을 샀다. 복녀 부부의 생계는 직격탄(直擊彈)을 맞게된다. 왕서방 결혼식 날 밤, 왕서방을 찾아간 복녀는 낫을 들고 행패를 부렸지만, 어느새 낫은 왕서방의 손에 쥐 어져 있었고 복녀는 피를 쏟으며 땅바닥에 고꾸라져 있었다. 왕서방은 복녀의 남편과 한의사를 매수 (買收)했다.

 

사흘 후, 복녀는 뇌출혈(腦出血)[뇌일혈] 사망 판정을 받고 공동묘지에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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