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1976년까지 문학지들에 게재된 이문구(李文求)(1941~2003) 의 자전적 연작(連作)소설 8편을 하나로 묶은 책이다. 작가의 어릴 적 가치관 형성에는 한학자(漢學者)이자 선비로서 긍지가 대단했던 할아버지로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고풍스러운 말투나 어려운 한문(漢文) 어구(語句)들에 사투리를 능수능란하게 가미한 독특한 문체(文體)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를 늘어놓기 전에 먼저 나부터 소개함이 바른 순서 같아 말머리로 삼은 것이 〈일락서산〉이다. 실화를 그대로 필기한 〈화무십일〉 같은 것도 있고, 〈여요주서〉와 〈월곡후야〉처럼 지금도 그 자리에 사는 동생이나 친척의 이야기도 있으며, 후제(後際)[미래]의 자녀나 조카들에게 읽히기 위해 소설이니 문학이니를 떠나 눈물지어 가며 쓴 고인(故人)에 관한 추도문 〈공산토월〉 같은 글도 있다.”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18년 동안 온 동네를 제집 마당처럼 여기며 살다가 떠난 지 13년 만에 찾은 고향 충남 보령시 대천읍 대천리. 작가는 마을 사람들을 찾아볼 용기를 내지 못한다. 대대로 사대부 집안이자 마을의 유지(有志)였던 탓에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작가 집안의 행랑(行廊)[하인]이나 아전붙이였던지라, 작가의 할아버지가 나이 불문하고 하대(下待)하면서 자라게 했기에 “그네들을 지칭할 명칭의 마땅찮음 때문”이었다.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 집안은 완전히 망했고, 그해 섣달[음력 12월] 90세를 일기(一期)로 작가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피난처에서 돌아오는 길이 늦어 작가만이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정반대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치가(治家)하는 데 있어 일치된 점이 있었다면, 기제(忌祭)[제사]와 다례(茶禮)[차 예절]를 성의로 모셔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느 권속(眷屬)[집안 식구]이건 예배당과 절간 왕래를 엄금시킨 일”뿐이었다. 작가의 아버지는 해방 후, 마을의 사회주의 지도자였던 이력(履歷) 때문에 옥고(獄苦)를 치르는 횟수가 잦아졌지만 “매사에 지극히 의연하고 여유 있고 묵중한 자세”를 유지했다. “목숨을 내놓고 자신의 사상을 관철하고자 하던 그 굳건한 정신이 외경(畏敬)[두려워하면서도 존경함]스러웠다.”라고 작가는 회상한다. 그리고 옹점이에 관한 설명도 잊지 않는다. “술장수의 데림추[남에게 끌려다니는 사 람]였던 이매라는 화류계 퇴물이 행랑아범과 좋아지내다가 어느 옹기점(甕器店)의 독[항아리]들 틈에서 낳았다 하여 이름이 옹점이다. 우리 집으로 들어온 것은 그녀 나이 7세 때였다. 마음씨는 비단결같이 고운 데다 손재주가 좋고 눈썰미가 뛰어나며, 인정과 동정심이 많은 점에서 어머니는 노상 쓸 만한 아이라고 추어주었다. 그러나 그릇을 잘 깨는 덜렁쇠였고, 참새 못잖던 수다쟁이이기도 했다.” 이런 생각들에 잠긴 채 “옛집을 되돌아보니, 그 너머 서산마루에는 해가 지고 있었다.”라며 〈일락서산〉(日落西山)이 끝난다.
“난리 났던 해(1950)에 지은 농작물을 치안대에 모조리 압수당한 여파”로, 작가의 집안을 비롯해 “마을 사람들이 푼돈이나마 얻어 연명할 수 있을 수단이라고는 개펄에 나가 게나 조개를 잡고 고동과 파래를 뜯는 일 그리고 산에 올라 나무를 해다 파는 두 가지 방도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윤영감 내외에 스무 남은 된 며느리 그리고 젖먹이 어린 솔이”까지 네 식구의 피난민이 어찌어찌하다 작가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러다 달포[한 달 남짓]가 지나자, 징집을 피해 숨어 있던 솔이 아버지 학로가 나타나더니 크게 부부싸움이 벌어진다. 여관 종업원으로 일하던 솔이 엄마가 자주 외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돈푼 깨나 뿌리게 생긴” 장돌뱅이 서울 사내와 눈이 맞은 솔이 엄마는 솔이를 데리고 집을 나갔고, 보름 후 학로는 뒷산에서 목을 맨다. 그리고 윤영감 내외도 솔이를 찾겠다고 길을 떠나면서 〈화무십일〉(花無十日)이 끝난다.
작가보다 열 살이 많은 옹점이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곳이 〈행운유수〉(行雲流水)이다. 시집 가고서도 수시로 찾아와 어머니에게 살갑게 했던 옹점이의 앞날에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한 건, 그녀의 남편이 징집된 탓에 시댁으로 들어가게 되면서부터였다. 시집 식구들은 옹점이를 모질게 대했다. 시집 식구들 처지에선 징집은 곧 죽음이요, 그렇게 남편을 잃게 되면 젊은 며느리이니 곧 다른 사내와 눈 맞아 떠날 남의 식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옹점이가 작가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쯤 작가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작가가 상경한 후 들려온 소식은 “옹점이가 약장수 패거리를 따라다니며 노래를 부르더라는 거였다. 혼잣 몸 추스를 만큼 장사할 밑천이 잡힐 때까지.” 구름과 물이 흘러가듯 그렇게 인간의 삶도 흘러간다.
초록 물과 푸른 산이 떠오를 만큼 어린 시절 작가를 끔찍하게 챙겨주던 “여남은(열 남짓한 수) 살이나 더 먹은” 대복이와 함께 한 행복하면서도 슬픈 추억이 〈녹수청산〉(綠水靑山)이다. “대복이 뒤만 따라다니면 모든 걸 내 맘대로 장난해도 겁날 게 없던 그리운 시절, 내가 일곱 살 나던 해부터 한 이태 동안의” 그 무렵, “미군들이 들이닥치면서 함께 들어온 외래 문물에 휘말려” 대복이가 변하기 시작했다. “언사가 거칠어진 데다 행동 또한 후레자식 소리 듣기에 알맞은 짓만 하고” 다녔다. 어느 날 “감히 넘보지 못할 참봉집 손녀 딸 순심이를 건드리려다 강간미수”로 체포되기까지 했다. 전쟁 당시 아이들에게 북한 노래를 가르쳐 주던 고등교육까지 받은 (마을의) 여성 동맹 책임자였던 18세 순심이는 국군이 올라오면서 자취를 감췄는 데, 놀라운 건 출소한 대복이가 놀랍게도 참봉집 머슴으로 자청해 들어간 것이었다. 이듬해 징집되어 대복이가 마을을 떠나던 날, 골방 구들장 밑에서 두더지 생활을 하던 순심이가 체포되었다. 변소 속에서 떠나는 대복이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심하게 입덧했고, 그런 순심이를 누군가가 보고 신고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인연이었을까. (…) 헤아려보면 석공(石公)은 우리 집안 삼대에 걸친 불행들을 모두 뒤치다 꺼리한 셈이었다. 할아버지로부터 나까지.” 〈공산토월〉(空山吐月)은 작가의 집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던 석공을 백혈병으로 잃은 후 눈물 어린 감사의 마음으로 그에게 바친 이야기이다. “그의 이름은 신현석, 향년(享年) 37세였고, 살아 있다면 올해 48세가 될 터였다.” 석공네는 아버지의 맹목적 추종자였다. 1950년 8월 25세의 석공은 군청 서기가 되었지만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국군이 들어오면서 체포되어 4년 반의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부지런한 성격에 살림은 제법 펴졌다.
아버지의 병환(病患)에 “좋다더라는 약이 있으면 자기네 곡식 자루를 메고 가서라도 구해왔다. 용하다는 의원 한 번 보이기 위해 밤길 새벽길을 가리지 않고 뛰었었다. 어머니의 수의(壽衣)도 석공 손으로 입혀졌다. (…) 칠성바위 안쪽 할아버지 산소를 달리 모실 수밖에 없음을 알린 이도 석공이었고, 내가 몸뚱이만 내려가도 아무 차질 없이 모든 게 마련돼 있던 것 역시 석공의 분별(分別)이었다.” 그러던 석공이 1961년 5⋅ 16 쿠데타가 나던 해 한 여름 (작가가 대학 1학년생이었을 때) 서울에 있는 작가를 불쑥 찾아왔다.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별것 아닌 뭔가를 검진하기 위해서라고만 말했다. 그렇게 돌아가고 달포[한 달 남짓] 후, 석공은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다시 실려 왔다. “‘나 오래 살구 가네. (…) 후년이면 정희 그년두 중학들어갈 텐디. 자네 장가가 살림나먼 자네 집에 데리다가 식모루 쓰소. 식모 시키면서 야간 핵교라두 보내 주야 허여 … 자네가 책임지구 고등과까지만 가리쳐주어 … 애비웂이 큰 새끼들, 글이나 넘들 반만침이라두 배워야지 …’ 그는 그것으로써 유언을 한 셈이었다.”
〈관산추정〉(關山芻丁)은 작가가 소꿉친구 유복산을 회상하는 이야기이다. 복산이의 아버지 유천만은 “왜정(倭政) 때 징용에 끌려가 고생이 자심(滋甚)[매우 심함]했다더니 마흔네댓 안쪽이라고 들은 것 같은 데도 이미 찌들고 겉늙어 (…) 일이라고 이름할 만한 것이면 덮어놓고 비켜섰는데, 동네에서 사람으로 쳐 주기를 주저하게 된 것도 그 빈둥거리는 꼴을 보기 싫어한 나머지였다.” 복산이의 어머니가 매일같이 묵을 쑤어 팔던 까닭에 “사람들은 묵집이라고 불렀는데 (…) 남편 유천만보다 열 배는 낫다 하여 (복산이 어머니를) ‘만만이’라고도 불렀다.” 복산이의 “마음 씀씀이는 작은 대복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너그럽고 자상했다. 나보다 두 살이 위였는데 하는 짓을 보면 천만이와 만만이를 반반씩 빼다 박은 꼴이었다.”
“고향을 지키고 있어 고향에 가려면 반드시 거치지 않을 수 없는 산을 ‘관산(關山)’이라 일컫는데 (…) 내게는 이제 복산이가 관산이었다. 그가 그곳에 남아 있지 않았다면 나는 그곳이 고향이라는 증거를 한 가지도 지니지 못한 셈이 될 터였다.”
‘함께 노래하고 차례를 풀어 밝힌다.’라는 뜻의 〈여요주서〉(與謠註序)는 “천성이 우둔하여 무슨 일에나 흥미가 없었고 (…) 한 번만 귀띔해줘도 넉넉할 것을 열번 스무 번 가르쳐 봐야 소용이 없어 ‘늘 몰라’라는 놀림의 뜻인 장부식(長不識)”이라는 별명을 본인만 알아듣지 못했던 친구 신용모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재판받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달이 일그러진 한 밤’이라는 뜻의 〈월곡후야〉(月谷後夜). 친구 집에서 14세의 6학년 순이가 개에게 물려 쓰러지면서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순이가 그 자리에서 낙태(落胎)했기 때문이었죠. 순이는 “겁에 질려 입을 열지 않았고, 그러는 동안 동네방네 학생을 비롯해 총각과 홀아비치고 지서(支署)[파출소]에 다녀 오지 않은 이가 없었다.” “번역되어 나온 소설책을 띄엄띄엄 건성으로 읽어가며 마음 내키는 대로 변조 (變調)하는” 직업을 가졌던 작가의 친구 김희찬은 동생 김수찬과 함께 그즈음 귀농(歸農)했다. 범인은 순이의 친구 봉자의 아비 김선영이었다. “마흔 살이나 되었고 아이가 셋에 농협의 대리를 지내다 그만둔 만큼” 배운 사람이었지만, 폐결핵 중기였다. 그는 순이 어머니에게 “3만원과 두 마지기짜리 밭문서” 를 위자료로 주고 순이의 낙태 사건을 합의 봤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었던 수찬을 비롯 한 마을 젊은이들은 김선영을 붙잡아 단단히 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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