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적으로 말한다면 데까르뜨의 철학은 네덜란드로 옮겨간 후 수년 동안에 대개 1633년에 이르는 사이에 형성되었으리라고 추측한다.
첫째로 데까르뜨의 관심을 끈 것은 원자론(原子論)의 사고방식이 세계인식을 하는데 수학의 적용을 가능케 한다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감각적으로 알려지는 세계를 넘어 기하학적인 성질을 갖는 원자의 객관적 세계를 생각함으로써 데까르뜨가 명증적이라고 인정한 유일한 학문인 수학에 대한 새로운 적용 영역이 넓게 열려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감각하는 가지 가지의 물건의 모습이 물건 그 자체의 모습이 아니고 감각 기관에 대한 물건의 작용의 결과가 간접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해석을 전제로 하고 있다. 감각이란 물건의 자연 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물건에 대한 인위적인 기호(記號)와 비슷한 것이다.
그렇지만 둘째로 데까르뜨에게 있어서는 객관적 물체 세계가 감각적 경험을 넘어선 지성적 인식이라고 하는 점이 갈릴레이의 경우에 비하면 훨씬 더 큰 의미를 갖는 것이다. 데까르뜨에게 있어서는 객관적 세계는 감각적 사실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가설적(假說的)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지성(知性)이 직접 감각없이 아는 것이다. 기하학은 실험을 필요치 않으나 그대로 물체 세계의 인식인 것이다. 이 점에서는 데까르뜨가 갈릴레이보다는 케플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우리는 플라톤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경험을 빌지 않고 세계의 객관적 본질을 우리가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 플라톤주의의 생각은 일상 생활의 감각적인 경험에서 본다면 하나의 놀라움인 것이다. 플라톤은 이 놀라움에 관하여 그대로 생각한 나머지 우리의 영혼이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보았던〈이데아〉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는 까닭에 그것을 상기(想起)하는 것이라고 하는 약간 신화적인 해명(플라톤의 상기론)을 하였다. 이에 대응하는 데까르뜨의 생각은, 신이 우리의 영혼에게 진정한 관념(觀念)을 부여하였다는 것이었다. 진정한 관념이란 객관적 실재(實在)에 대응하는 관념이란 뜻이다.
벌써 1619년에 한 사색을 표시한 단편(斷片) 속에서〈학문의 씨앗이 우리들 속에 있다〉고 말하였다. 1616년 네덜라드로 이주하기 직전에 써두었다고 인정되는 단편인 정신지도의 규칙《精神指導의 規則》에서도〈진리의 씨앗〉이 우리의 정신에 머물러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방법서설《方法敍說》중에서도 〈세계론〉에 관하여 말할 때에도, 물체 세계의 기초적 법칙은〈신이 자연 속에 확고하게 정해 놓은 것이고 또 그 관념을 우리의 정신 속에 확고하게 박아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생득관념(生得觀念)〉또는〈본유관념(本有觀念)〉으로서 데까르뜨의 형이상학의 기둥[支柱]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파리에서 머물때 갖게된 이와 같은 플라톤적인 사고방식은 신(神)이 우리의 정신 속에 박아준 진리의 존재를 주장하는 점에 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초기 사상에 통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베그만(데까르뜨가 사귄 교우 交友)의 원자론과 케플러의 플라톤주의와 아울러 데까르뜨 철학의 형성에 기여한 세째 요소로 인정되는 것이다. 실상 데까르뜨는 파리 체재기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神學)의 전통에 접촉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이같은 그리스도교 신학과의 접촉으로 말미암아 데까르뜨의 철학에는, 지성(知性)의 플라톤주의와 병행하는 또 하나의 요소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지성에 맞서는 의지(意志)의 문제인 것이다.
여기에 함축(含蓄)되어 있는 전통적인 문제를 상기해본다면 우선 첫째로 신(神) 자신에 관하여, 지성과 의지의 어느 쪽을 더 존귀(尊貴)하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 속에 진리를 박아준 신은 그 자신의 지성 속에 진리의 원형(原形 idea)을 갖고 있지만 이 신의 진리는 신의 의지에 의해서도 좌우되지 않는 것인가, 혹은 반대로 신의 의지(意志)가 자유로이 정한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는 플라톤주의에서 본다면 진리 자체는 의지의 재정(裁定)에 무관한 독립성을 갖는다고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교의 신도 그리스의 신들과 같이 운명의 필연에 복종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이 신에 있어서도 지성보다 의지가 우위(優位)를 갖는다고 하는 생각은 14세기의 스콜라 철학자 옥캄의 이름을 따서 옥캄주의의라고도 불리었으니 이 용어를 쓴다면 신에 관해서 플라톤주의와 옥캄주의의 대립이 문제였던 것이다.
데까르뜨는 그 사상의 지주(支柱)의 하나를 플라톤주의에서 받아들였으나, 네덜란드 체재의 초기에는 이성적 진리의 해석에 있어서 옥캄주의에 가까와졌던 때도 있다.
신은 우리의 마음속에 진리를 머무르게 했을 뿐만이 아니라, 신은 그와 같은 진리眞理를 자유로이 정한 것이어서,만약에 신이 하고자 한다면 2+2 =4가 안 되게 할 수도 있었다. 결국은 한마디로 이성적 진리도 신의 자유로운 창조라고 하는 생각을 데까르뜨는 가지려고 했던 것이었다. 후에 언급 하겠지만 데까르뜨의 형이상학 주저인 성찰《省察》에서 신이 우리들을 속이느냐 안 속이느냐 하는 것이 문제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옥캄주의의 논점을 드러내놓은 셈이다.
그런데 둘째로 다음에 자유의지의 문제는 말할 것도없이 직접 우리 자신에 있어서도 존재하는 문제이다. 우리의 자유의지가 있다는 사실은 신의 섭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놀라움[驚異]이며, 하나의 기적인 것이라고 데까르뜨는 쓰고 있다.
주(신)는 세 가지의 놀라운 기적을 행하였다. 즉 무(無)로부터의 창조, 자유의지, 그리고 신인(神人)
참말로 이 경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 이래의 신학의 큰 문제이었다. 데까르뜨는 몸소 그리스도교 신학을 논하는 일은 없었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는 시종 일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자, 그런데 위에서 말한 바 데까르뜨 철학의 형성의 세가지 요인(要因) 1) 즉 감각 세계를 넘어선 객관적 자연 (物體世界)을 생각하는 것과 2) 플라톤주의와 3) 자유의지에 관한 그리스도교 신학의 논쟁 가운데, 네덜란드로 옮아간 직후에 비롯하는 그의 철학의 최초의 구상에 있어서 주로 나온 것은 처음 두 가지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런 것을 암시하는 것이 바로 네덜란드 이주 직전에 쓰여졌다고 생각되는 정신지도의 규칙《精神指導의 規則》이란 단편이다.
1628년에 이르러 데까르뜨는 새삼스러이 학문일반의 방법을 예전 난로방 시절에 했던 것보다 더 꼼꼼히 고찰해 보고자 하였다. 즉 방법에 관한 하나의 논문을 쓰고자한 것이다。그 미완(未完)에 그친 단편이 유고(遺稿) 중에 발견된 정신지도의 규칙《精神指導의 規則》이다
이것은 우선 학문의 방법 일반, 다음엔 수학에 있어서의 방법, 그리고 최후에는 자연학에 있어서의 방법을 논하고자 한 것이지만 절반쯤밖에 쓰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하나의 규칙의 설명으로서 후의 형이상학과 자연학 속에 포함되는 데까르뜨의 주장이 많이 기술되어 있다. 이를테면 사태(事態)의 필연적인 결합의 예로서 다음과 같은 예가 인용되어져 있다. 소크라테스가「자기는 모든 것에 관해서 의심한다」고 할 때에, 그는 그 때문에 적어도 자기가 의심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것이고 또〈참眞) 혹은 거짓[僞)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또 「나는 존재한다. 고로 신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도 필연적인 추리인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공간은 공허(空虛)는 아니라는 것 [진공〉의 존재를 부정함]、아리스토텔레스의 〈장소〉나 〈운동〉의 정의는 명백히 직관할 수 있다는 것을 불명료 한 말로 풀이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생각컨대 데까르뜨는 이와같이 내용적인 주장을 예시(例示)하는 중에 벌써 방법형식을 갖추어서 표시하는 흥미를 잃어버리고 방법론을 단편대로 남겨놓은 채, 형이상학과 자연학의 체계적 서술에 전진한 것이다.
2023.02.01 - [철학(데카르트)] - 데카르트 철학 이해하기 4: 데카르트 철학의 형이상학과 정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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