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가톨릭 신도이고, 결혼했으며, 번듯한 학력을 가졌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라는 의미도 내포한) ‘자연스럽다’라는 것을 느끼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
그러나 그런 것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통해 얻게 되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특정한 사회 안에서만 의미를 가질 뿐이다. ⋯⋯ 롤랑 바르트 「신화학」 Mythologies(1957)
가톨릭 신자가 다수인 프랑스에서 개신교도였고 동성애자였으며 박사학위가 없었 던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1915~1980)의 두 가지 주된 관심사는, ‘자연과 문화를 구분할 필요성’ 그리고 ‘언어의 올바른 사용에 유념할 필요성’이었다. 다시 말해서 바르트가 보기에 현대사회가 범하는 가장 큰 오류 중 첫 번째는 사회 제도와 지적(知的) 관습이 일반적으로 즉 ‘자연’이라 불리는 ‘사물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언어를 사회적 규약 (規約)의 기호라기보다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학위를 가졌고, 가톨릭교도이며, 결혼해서 아이가 있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통계적 우연이자, 우리의 출생과 양육에서 비롯되어 그저 따르 게 되는 (특정한 장소에 국한된) 삶의 한 방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용인되거나, 도덕적으로 바람직하거나, 미학적으로 멋진 것을 의미할 때도 종종 ‘자연스럽다’ 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 또한 매우 빈번하게 저지르는 오류이다. 먹고, 자고, 사랑하고,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분명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누구와 언제 어떻게 얼마나 먹고 자고 사랑하고 말하는지는, 우리가 몸담은 사회와 계층에 따라 다르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것은 없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런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내가 만일 20세기 이전의 멜라네시아 트로브리안드 군도에서 태어났다면, 여러 명의 아내를 두고 읽고 쓰는 것을 배우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도 원래부터 당연한 것은 아니다**
어휘는 그것이 언어라는 구조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 (즉 소쉬르의 주장처럼 다른 어휘들과의 관계) 때문에 의미를 지닌다. (한 개인이 가족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지니는 의미와 힘에는 큰 차이가 있죠) 의사 소통의 모든 형식은 자의적(恣意的)이고 인위적[인공적]으로 만들어지며, 약속된 어떤 구조에 따라 작동하 는 것이다. 바르트가 「신화학」에서 의도한 것은, 기호가 가장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사실은 정교하고 자의 적이며 인위적으로 약속된 (특정 사회나 시대의) 규칙의 일부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기호는 자연스러운 것 이라는 생각’을 타파하는 것이었다. 특정한 기호 체계 내에서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은, 그 안에서 이용되 는 항목 간의 차이라는 것이 소쉬르의 기본적인 주장이다. 우리는 특정한 방식으로 바라보고 행동하는 것 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런 방식은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이다.
소쉬르 이전의 언어학자들은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개별 발화자들이 개별적인 언어 즉 ‘파롤’ parole을 어떻게 발음하는지에 집중했고, 언어가 지금 여기 (이 사회 또는 이 시대)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다시 말해서 전체 언어 체계인 ‘랑그’ langue는 신경 쓰지 않았다. 조금 어렵게 말하자면 파롤은 (시간의 경과 에 따라 함께 변화하는) ‘통시태(通時態)[통시적인 형태]’ diachrony이고, 랑그는 (특정 시기에 보편적인) ‘공시태(共時態)[공시적인 형태]’ synchrony라고 할 수 있다.
바르트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유형의 기호가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교의 십자가나 이 슬람교의 초승달이 신앙과 충성을 의미하는 것처럼) 단 한 가지 기능만을 갖는 아이콘적[도상적(圖像的)] 기호 iconic sign를 한쪽 끝으로 하고 (이것은 미국 언어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 Charles Sanders Peirce(1839~1914)의 주장임을 171회 「구조주의」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가능한 의미가 거의 무한정한 자의적[임의적] 기호 arbitrary sign를 다른 쪽의 끝으로 하면서, 그 사이에 (영국 신사[공무원]의 전통적 인 검은색 중절모와 접은 우산처럼 특정한 시각적 기호들이 작동하는 방식인) 유연적(有緣的) 기호 motivated sign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특히 바르트는 기호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사물] 간의 관계가 ‘자의적’이라는 소쉬르의 관점을 넘어서서, ‘유연적’이라는 표현이 기호와 대상 간의 관계가 ‘자연적’이라 는 함의(含意)뿐만 아니라 ‘자의적’이라는 뜻과 뗄 수 없는 ‘비합리적’이라는 함의까지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모호함도 허용하지 않는 완전히 자연스러운 기호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영국 신사들이 즐겨 쓰던 검은색 중절모는 해방 후 우리나라의 주먹들도 즐겨 썼고, 사회주의 운동에서는 분노 를 표현하는 기호인 주먹을 쥐고 들어 올리는 것이 노동자들의 친선과 연대를 나타내는 기호로 사용되기 도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돼지고기를 금하고 무슬림이 술을 금하는 것은, 식중독을 피하거나 술에 취 하지 않으려는 실제적인 목적이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모두 자신들을 주변의 다른 민족들과 구 분하려는 (구별 짓기의) 중요한 수단이자 자의적인 ‘기호’일 뿐이다. 바르트는 언어적이든 비언어적이든, 기호를 그것이 속한 사회적 맥락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 그 기호가 어떻게 그리고 왜 작동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저자의 죽음」(1979)에서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 다.”라는 그의 주장은, 기호는 맥락[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그 기호에 부여된 최종적인 의 미는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텍스트의 의미를 결정하는 최종적인 권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 한다. 하지만 자크 데리다처럼 기표[시니피앙]가 끊임없이 미끄러지기 때문에 텍스트의 의미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만큼 극단적이지는 않다.
바르트가 「기호학의 요소들」(1964)에서 공격한 현대사회의 주요 오류 중 하나는, 언어를 (수학 기호들의 집합과 거의 동등하게) 의사소통의 중립적 수단으로 보려는 경향이다. 말은 순결하고 중립적이고 정확해 서 이것을 표현하고 저것을 설명하며 그것을 의미한다는 생각이야말로 언어에서 함의(含意) connotation 의 역할을 무시하는 것으로, 문학 작품을 실재 세계와 구별하는 것은 문학 작품이 (특정한) ‘기의[시니피 에]’를 (전혀) 갖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소쉬르와는 달리 바르트는, ‘체계[랑그]’를 그 체계의 ‘표명(表明)[파롤]’과 병치(竝置)시킨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친족관계의 구조라는 랑그는 여성의 교환이라는 파롤로 나타난다고 말했던 것처럼 (또는 요리에서 배제와 연합의 규칙이라는 랑그가 가정이나 민족의 전통 요리법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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