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1899~1961)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대표작이다.
그때 그때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깊이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미국인 대학생 프레더릭 헨리 Frederic Henry는, 이탈리아 유학 중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勃發)하자 부상병들을 후방으로 이송(移送)시키는 이탈리아 의료부대에 장교로 입대한다.
“나도 (왜 미국인으로 이탈리아 군대에 입대했는지)잘 모르겠습니다.세상일이라는 게 언제나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잖요.”
군대에서 알게 된 (쾌락주의자인) 이탈리아 외과 의사 리날디 Rinaldi가 프레더릭에게,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지역에서 근무하는 (약혼자가 전사(戰死)한 후 1915년 말부터 야전병원에서 근무한) 영국인 간호사 캐서린 바클리 Catherine Barkley를 소개해준다. 괜찮다 싶어서 작업을 걸었는데, 캐서린은 의외로 쉽게 넘어온다. 그렇게 몇 번의 만남 이후, 프레더릭은 (독일의 동맹국인) 오스트리아와 대치하고 있는 최전방 전선(戰線)에 배치되면서 자연스럽게 캐서린과 헤어진다. 프레더릭과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생각한 캐서린은 슬퍼했지만, 캐서린과의 관계를 잠시 만나고 헤어지면 그만인 가벼운 사이로 생각한 프레더릭은 무덤덤했다. “난 가끔 밤에 하느님이 두려울 뿐이다. (…) 나는 캐서린을 사랑하고 있지도 않으며, 사랑하 고 싶은 생각조차 없다. 그녀를 사랑하는 건 브릿지 같은 게임이었고, 그녀를 사랑하는 게임은 카드를 갖고 하는 대신 말로 하는 것일 뿐이다.”
그때까지도 전쟁을 제대로 체감(體感)하지 못하던 프레더릭은 적군의 포탄에 무릎을 다쳐 밀라노 Milan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되고, 그곳으로 파견 근무 온 캐서린을 다시 만나게 되면서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여름 내내 뜨거웠던 둘의 사랑이 캐서린의 임신으로 결실을 볼 때쯤, 입원한 상태에서도 줄기차게 몰래 술을 마시던 것이 들통난 프레더릭은 (무릎이 다 낫자 이번에는 황달(黃疸) 진단을 받아 계속 병원에서 쉬려고 일부러 술을 마신 것이라는 군의관의 판단에) 다시 예전 지역으로 강제 전출된다. 이때 캐서린은 임신 3개월째였다.
그러나 이제는 예전 부대의 분위기조차 이전과는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특히 전쟁에 지친 병사들이 전쟁의 당위성(當爲性)에 회의(懷疑)를 품고 있었다. 병사들은 어느 쪽이 승리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전쟁이 끝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시골 농부들도 전쟁을 믿을 만큼 무지(無知)하진 않아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또 깨달을 능력도 없는 우둔한 자들이 한 나라를 지배하는 거죠. 그런 부류 때문에 지금 이런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전쟁만 하는 거죠. 멍청해서요. (…) 전쟁을 원하는 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대리(代理)) 전쟁을 시키는 거죠.” 적군도 자기들도 모두 전쟁을 원하지 않음에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콜레라로 인해 ‘겨우’ 7000명의 사상자(死傷 者)만 났을 뿐이다.”
곧 전세(戰勢)가 역전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에 밀리기 시작한 이탈리아는 후퇴를 결정한다. 군대와 마을 사람들이 섞인 대규모 후퇴 길은 그야말로 거북이 걸음에다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게다가 일부 병사들은 (이젠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임을 시위(示威)하기 위해) 무기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공공연히 탈영했다. 역시 탈영을 계획한 프레더릭은, 세 명의 부하를 이끌고 차량을 이용해서 본대(本隊)에서 빠져나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택한다.
그러나 곧 길을 잃었고, 그들의 차는 진흙탕에 빠져 꼼짝하지 못한다. 진흙탕에서 차를 꺼내는 일을 돕지 않은채 저 혼자 살겠다고 달아나는 부하 한 명을 프레더릭이 총으로 사살(射殺)한다. 그리고 곧 그들을 탈영병으로 간주한 이탈리아 헌병부대에 의해 또 한 명이 죽자, 나머지 부하 한 명은 차라리 적군의 포로가 되는게 낫다며 도망간다. 결국 체포되어 호송(護送)되는 프레더릭을 기다리는 건, 고문에 이은 즉결 처형이었다. 죄목은, 그들과 같은 탈영 병들의 배신행위로 이탈리아가 열세(劣勢)에 처하게 되었다는 반역(反逆)행위였다. 그러나 호송 도중 타글 리아멘토강 River Tagliamento 위의 다리를 지날 때 프레더릭은 강으로 뛰어내려 탈출을 시도했고, 그 후 지나가는 열차에 몰래 몸을 숨긴 채 (그제야 뜬금없이) 캐서린을 찾아 밀라노로 향한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이탈리아 북부 스트레사 Stresa로 발령받아 떠난 후였다.
“모든 의무와 더불어, 분노도 강물에 씻어버렸다. 헌병에게 체포되던 순간부터 나의 의무는 이미 사라져버렸다. (…) 군복을 벗고 계급장을 떼어 낸 건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미 그 일에서 손을 뗐다. 나는 그들 모두에게 행운을 빌었다. (…) 그러나 이제 더는 내가 나설 일은 아니었다.”
탈영병 신세였던 프레더릭은 다시 은밀히 스트레사로 가서 극적으로 캐서린을 만난다. 그러고는 함께 보트를 타고 호수를 가로질러 중립국 스위스로 망명한다. 프레더릭은 미국인이고 캐서린은 영국인이었기에 입국 심사를 무난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 후 산 중턱의 집을 구해 둘은 겨우내 행복을 만끽한다. 그러나 몇 달이 흐르면서 서로의 성향이 다시 기어 나오기 시작한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소유하고 싶어 하는지 (프레더릭 당신은) 모를 거예요. 아예 당신 속으로 들어가 당신이 되고 싶어요.”라고 생각하는 캐서린과는 달리, 프레더릭은 “나는 단독 강화조약을 맺은 것이다. (…) 여기에는 전쟁이 없다. 그러다가 문득 나 혼자서 일방적으로 전쟁을 끝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쟁이 진정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무단결석한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학교에 가지 않고서 지금쯤 교실에서 어떤 수업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하는 학생.” 이었죠.
캐서린의 출산일이 다가오면서 도시 로잔 Lausanne의 한 호텔에 짐을 풀고 다음 날 프레더릭은 캐서린을 근처 병원에 입원시킨다. 그러나 불행히도 캐서린이 낳은 아이는 탯줄이 목에 감겨 죽은 채 태어났고, 캐서린은 사경(死境)을 헤맨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의 흔들림 없이 (때로는 건성으로) 삶을 일관하던 프레더릭이 처음으로 격한 감정을 표출한다. 신도 사랑도 믿지 않던 그가 신에게 캐서린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많은 출혈로 캐서린도 끝내 숨을 거두자, 프레 더릭은 홀로 빗속을 걸으며 호텔로 돌아간다.
“잠시 뒤 나는 병실 밖으로 나와 병원을 뒤로한 채 비를 맞으며 호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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