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버트런드러셀 인생관 명언 행복론과 반전운동

지적허영 2023.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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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 요약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영국의 철학자, 수학자, 논쟁가, 작가 등으로 20세기 철학의 중요 인물 중 한 명으로 그의 철학은 논리주의, 분석철학, 인도주의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세계의 복잡성과 인간의 존재를 분석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철학의 문제들", "젊은이들을 위한 역사", "근대 철학사", "이웃을 사랑하라" 등이 있으며 그는 또한 런던스쿨오브이코노믹스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버트런드러셀

버트런드 러셀의 인생

약 1세기에 걸친 삶을 영위하다가 세상을 떠난 버트런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은 영국의 수학자요 철학자요 평론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그의 인격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유명했던 러셀은 1872년 5월 18일에 태어나 1970년 2월 2일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정확히 98세의 긴 일생을 산 것이 된다.

 

그는 웨일즈의 명문가(그의 할아버지는 영국의 총리를 지낸 존 러셀 백작이다)인 귀족가문 태생으로 세 살 때 고아가 되었으며 그의 형(프랭크 러셀)이 1931년 죽자 작위를 계승하여 러셀 경(卿)이 되었다.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대학에 입학하여 수학과 철학을 배웠고 졸업 후 모교의 펠로우가 되었다. 이어《라이프니쯔의 철학(The Philosophy of Leibniz, 1900)》과 《수학 원리(The Principles of Mathematics, 1903)》 등을 저술했고, 1910~16년까지 케임브리지 대학의 강사로 있으면서 화이트 헤드와 공저로《수학원리(Principia Mathematica, 1910∼13)》를 내어 기호논리학과 수학의 기수 이론을 확립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반전론과 평화론을 주장한 관계로 투옥되어 실직되기도 하였으며 종전 후에는 러시아 혁명이 미친 영향을 조사하기 위해 러시아를 방문했다가 공산주의에 크게 환멸을 느껴 그 이후에는 공산주의에 대해 언제나 비판적이었다. 이후 러셀은 북경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 하였으며(1920년부터) 병(폐렴)으로 귀국한 이후 노동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두 번이나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시카고 대학, UCLA 등에서 철학을 강의 하였으며 하아버드 대학과 뉴욕 시립대학의 강사로 임명되었지만 그의 저술 중에 성(性)문제를 다룬 것이 있어 물의가 일어나자 펜실베이니아 주(州)로 이주했다. 이후 러셀은 반스 재단에 가입하여 다양한 청중에게 철학사를 강연하게 되는데 이 강연이 그 유명한 철학서인 『서양철학사』의 기초가 되었다. 기인 앨버트 C. 반스와의 관계는 곧 소원해진 후 러셀은 1944년 영국으로 돌아와 다시 모교인 트리니티 칼리지의 교수가 되었고 국왕으로부터 훈장을 받았으며 컬럼비아 대학의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는 《사회개조의 여러 원리(Principles of Social Reconstruction,1916)》 《권력(Power, Its Social Analysis, 1938)》등의 많은 저서를 발간 하였는데 1950년노벨문학상까지 받았으며 노년에는 핵무기 금지운동과 식민지 해방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의 사회적 성공에 비해 결혼 생활은 불행하여(1894년부터) 세 번이나 이혼을 경험했다. 

버트런드 러셀의 사상: 실증주의

철학자로서 러셀은 경험주의적 경향을 취했고, 철학연구에 있어서는 언어 분석적 방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사회 사상가로서는 자유주의적 개량주의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공산주의를 배격했다. 방금 말한 바와 같이 그의 철학은 경험주의에 바탕을 둔 이른바 실증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그리하여 그 점에서는 방법적 태도로서 언어 분석을 피했다. 논리적 실증주의의 주장에 따르면 과학적 인식은 개인의 체험이나 직관 같은 주관적인 것이 아닌 공통적이고 객관적인 것인 이른바 간주관적(間主觀的 또는 상호주관적(相互主觀的): 주관적인 경험이나 생각이 다자간에 공감대를 이루는 경우)인 것이다.

 

객관적 인식은 주관적인 체험이나 직관만으로는 안되며 그것을 이미 알려진 사실과 관련시켜 표현함으로써 전달 할 수 있는 데까지 도달하여야 한다. 모든 과학은 다 그래야 하고, 또 모든 과학의 기본이 될 언어 기호의 분석이 과학철학의 중요한 사명이라고 보려는 태도이다. 그러므로 논리적 실증주의에 있어서는 경험적으로 실증불가능한 문제를 제기했던 종래의 형이상학을 배격한다. 가령 「물질로부터 정신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가」라든지「천체는 목적적 의식을 가진 것인가」하는 등의 물음은 마치「이도령의 마음은 스위스의 명승지」하는 식의 물음과 같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기보다는 문제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형이상학적 문제는 둥근 4각형이 있을 수 없듯이 과학적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으로 분류해서 형이상학을 전적으로 부인하려는 것이 논리적 실증주의의 특색이다. 이는 사실성에 입각하지 않는 진리란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이니 자연 관념론적 철학은 논리 실증주의자들로부터 배제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셀도 바로 이런 방법론적 태도를 취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과학이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이 문제가 지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위의 영역 외에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지식이든지 여하튼 도달할 수 있는 지식은 과적 방법에 의해서 도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발전하지 않는 것은 인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인것이다.

 

위 말은 그의 저서《종교와 과학》에서 나온 말이다.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이 진리 (지식)의 터전을 과학에 두고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는 진리는 진리가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과학적 지성과 윤리적 가치를 강조한 말로 짐작되는데 이처럼 과학적 객관적 사고방식으로서 사물을 이해하는 것을 그의 철학의 근본으로 삼았다. 이것은 관념론적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난 태도로써 지성(지식)은 실제 경험 속에서 생성하는 것이고 지성을 뺀 경험은 참된 경험이 아니라고 보는 태도이다. 러셀은 바로 이로부터 그의 학문과 인생관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고전적 형식의 전통 철학에 반발하고 시대적 의의에 따라 과학적·분석적·객관적인 학문의 태도로부터 인류 구제의 길을 모색하였다.

버트런드 러셀과 전쟁

제1차 세계대전은 러셀에게 생활과 사상에 걸쳐 일대 시련을 안겨 주었다. 〈외부 세계를 어떻게 해서 알 수 있는가〉하는 논리적 세계상을 구상하고 있을 때 사회와 역사적 외계는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수학·논리학의 패러독스를 해결하려고 자부하는 그에게 세계는 전쟁이라는 패러독스를 안겨 주는 것이었다. 그는 논리 세계와 수학 세계 그리고 현실 세계는 전혀 몰교섭적인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고 도피 하려고 하지 않았다.

버트런드 러셀: 평화주의자로서 전쟁에 대한 반전론

1914년 8월 영국이 선전포고를 한 것은 그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날 저녁 그는 선량한 평화주의를 지지하는 군중들과 함께 반전(反戰) 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다. 그도 영국 귀족으로서 애국심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문명을 사랑하는 자로서는 야만스런 행위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 후 러셀은 당시 평화주의자들의 도피처였던 오트린 모레르 부인이 주관하는 살롱의 주요 인물로서 폭넓은 반전운동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살롱식 반전운동만으로는 부족하여 직접 강연·저술·기고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반전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군중들 중에는 러셀의 반전사상의 근본취지를 이해하지 못하여 전쟁을 비판하는 이적 행위로 보고 흥분하기까지 하는 이도 있었다. 어느 교회에서 강연했을 때는 폭도들의 습격을 받은 적도 있고 여성들의 비난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동지들이 일어서서 입회한 경관에게 그는 훌륭한 영국의 철학자라고 설명하고 구원을 청했으나 효과가 없었다가 백작의 아우라고 하자 비로소 경관은 러셀을 구조해 주었다. 이러한 적대적 행위는 비단 민중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육군성은 정식으로 그에게 해안지대에서의 강연을 금지시켰으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당국이 해안지대에서의 강연을 금지시킨 까닭은 독일의 U보우트에 군중들이 어떤 신호라도 보내지 않을까 하는 구실에서였다. 로이드 조오지는 의회의 연설에서 러셀의 언동은 전쟁 수행에 〈중대한 방해〉가 되고 있다고까지 증언하기도 하였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그의 태도는 1차대전 때와는 그 양상이 좀 달랐는데 러셀은 히틀러를 정복시키는 데서 끝날 수 있다면 무방하다는 태도를 취했다. 1910년 이래 강사로 근무했던 트리니티 대학의 동지들은 그와 함께 할 수가 없게 돼갔다.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젊은 제자들은 차례차례 전쟁터로 사라졌고, 남은 사람들로부터 냉대를받았다. 1916년 어느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명령불복종 죄에 걸려 중노동 1년의 판결을 받은 사건이 일어나자, 사태는 급진적으로 돌변해 갔다. 러셀이 위원이었던 징병반대동맹이 발행한 항의의 팜플렛을 배포한 한 회원이 검거되었을 때 러셀은 일부를 〈타임〉지에 투고하고 그 팜플렛의 필자는 자기라고 밝혔다. 그 때문에 고발된 러셀은 그 해 6월 런던의 시장 저택에서 벌금 백 파운드의 판결을 받고 강연집은 물론 재판 기록의 공표도 금지되었다. 그후 그는 트리니티 대학의 강사직이 만장일치로 면직되면서 마음속 깊은 상처를 입고 미국으로 이주하려고 했지만 외무성에서는 여권 교부를 거부하였다.

버트런드 러셀 감옥에 가다

1918년 1월 3일 동맹의 기관지 <트리뷰널〉에 그는 다음과 같은 취지의 글을 썼다. 「바야흐로 평화가 오지 않으면 전유럽에는 기아상태가 닥쳐오고 말 것이다. 살기 위해서 사람들은 서로 식량을 빼앗으며 싸우게 될 것이다」이 글로 집필자는 고발되고 말았다。「재판관 디킨슨의 논고는 준엄한 것이었다。피고 러셀의 인상으로는 재판관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미쳐 날뛰고 있었다. 그토록 격렬한 증오는 일찌기본 적이 없다. 할 수만 있으면 나에게 무거운 처벌을 내리려고 했다」하기야 배후에는 세상의 여론도 있었을 것이다. 판결은 6개월의 제2부 금고였고 러셀은 상고했고 그 결과 제2부 금고에서 제1부 금고라는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그 해 5월에 그는 브릭스턴 형무소로 옮겨졌고 수인번호  2917호이름  B·러셀의 딱지를 가슴에 달아야만 했다.

 

형무소에서 그는 매일 네 시간의 저작 활동, 네 시간의 철학 연구, 네 시간의 일반 독서생활을 거듭했고, 그런 생활에서도 그는《수리철학 서설》과 듀이의《실험 논리학 논집》등의 서평을 집필했다. 매주 세 사람의 동시 면회가 허용되었는데 그는 뜻이 맞는 이 세 사람들과의 면회가 유일한 낙이었다. 그는 종전 무렵인 1918년 9월에 출옥했다。

버트런드 러셀: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전쟁관의 변화

1939년 이래 6년간의 미국 체재 기간 동안은 세계가 또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든 시기였다. 그는 평화주의자이었지만 항공기를 이용하는 화학병기나 세균 전술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리라고 짐작했으면서도 그는 1차 대전 때와 같은 적극적인 반전론을 퍼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히틀러 같은 독재자가 있는 한 세계평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히틀러 같은 독재자를 타도하는 전쟁이라면〉하고 적극적으로 반전론을 펴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때는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카이제르, Kaiser)와 싸울 필요는 없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재자 공격에 나섰고 종전 후에는 왕성한 평론 활동을 폈다. 전쟁 말기의 원자탄은 스탈린 체제하의 소련의 상황을 고려하는 한에 있어서는 그 투하가 불가피한 것으로 생각했다. 소련의 횡포를 막고 세계정부를 수립할때까지는 서구만은 원자폭탄을 보유해야 하고 소련은 그것을 보유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노동당 정부의 위촉을 받아 세계 각지에 강연 여행을 떠났는데 그의 그러한 논지는 미·소 냉전을 두려워하는 청중들에게는 감명을 주었지만 전후의 진보적인 지식인들로부터는 시국에 편승한다고 하여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의 사회 사상의 근본은 자유주의의 개량주의적 입장에 서서 세계평화를 옹호했고 그것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인류를 멸망으로 이끄는 원자폭탄으로부터 구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미·소는 군비축소와 더불어 평화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그의 지론이었다.

 

「최근 15년간에 정치문제, 사회문제, 도덕문제에 대해서 내가 생각한 일은 모두가 이제 1차 세계대전 발발에 대해서 내가 느낀 충격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과 씨름함으로써 점차 나는 어느 하나의 인생철학에 도달했다. 그런 경우 언제나 내 길잡이가 되어 준 것은 자연으로부터 부여받는 특성을 구비하고 있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서로가 그 생활을 비참한 것으로 만들지 않고 사회에 있어서 서로가 함께 살아갈 것인가? 그 길을 어떻게든 발견하고 싶었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으로부터 나는 확실히 알았다. 설령 어떤 훌륭한 행위의 규범이 있다곤 하지만 추구한 목적이 좋은 것이 아니었다면, 그것만으로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이것은 《나는 믿는다》에서 한 말이다. 무엇 때문에 전쟁(원자폭탄)을 막아야만 하는가 하는 그의 의도를 짐작케 한다. 크게는 인류의 평화에 두고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이다. 전쟁은 인류를 멸망으로 이끄나 평화는 인류를 구제로 이끌며 자유로운 삶을 영위해야만 이 평화와 행복의 꽃이 피어난다고 보았던 것이다. 과학은 인간의 생활을 보다 행복하게 하는 데 필요할 뿐 인류를 멸망으로 이끄는 무기여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평화에 대한 근본 사상이었다. 시대의 변천과 미·소의 냉전이 거듭해 갈수록 러셀의 평화론은 점차 지지를 받게 되었고 그가 편 원자폭탄 사용금지 시위에서는 많은 동조자를 얻었다. 세계는, 인류는 평화로와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신념에 세계 도처에서 그에게 동조를 기에 이른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잠시 항쟁을 잊고 인류의 존속을 원한다면 앞으로의 승리는 이제까지의 허다한 승리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것이 되리라는 것을 생각해 주기 바란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선택한다면 우리의 전도에는 행복과 지식과 지혜의 끊임 없는 진보가 전개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항쟁을 잊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굳이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것일까? 나는 인류의 일원으로서 전인류에게 호소한다. 인간이여, 오직 그것만을 명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이외는 전부 잊어버려도 좋다. 그것만 할 수 있다면 길은 새로운 파라다이스를 통해 열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할 수가 없다면 전 세계의 멸망, 오직 이것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수소폭탄과 인류와의 대결》에서 한 말이다. 새삼 설명이 필요없는 말이다. 살기 위해서는 살인무기를 피해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전쟁을 막아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그가 내세운 평화론의 근본 취지가 무엇인가를 대표하는 말이다. 이처럼 러셀은 평화 애호자였고 그것을 위해 평생을 싸운 사람이다. 그의 그러한 노력으로 인해 세계는 이 나마도 평화를 유지해 오고 있는지모른다. 

버트런드 러셀 철학의 요체

논리실증주의를 거쳐〈분석철학〉에 이르는 현대철학의 형성사를 잠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정신과 행동 〈경험적과 선험적〉, 〈대상언어와 논리언어〉, 〈비논증적 추론〉등의 후기 문제를 통해 전기의〈내적 관계와 외적 관계〉, 〈기술의 논리〉,〈집합론의 패러독스와 계형(階型) 이론〉등을 회고하며 러셀 철학을 더듬어 보려면 논리 실증주의와 분석철학의 형성사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2번 세계 대전의 격동을 그의 사회적 활동을 통해 고려해 보면 그의 사상과 생활은 현대 백년에 가까운 역사와 더불어 성장해 온 셈이 된다. 그 이론적 연구는 크게 관념론에서 논리학으로 논리학에서 과학으로 발전된 것이다. 후기 반생의 과학적 관심의 증대와 더불어 논리주의의 형식적 견고성은 다소 유연해진 감이 없지 않다. 자연이나 인간의 현실적 여러 문제에의 접근과 더불어 〈외부 세계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의 용어를 빌면 그것 또한 얼마간 감소되었다고 할 것이다. 한편 장기간의 연구 생활 중에 그 후의 논리실증주의나 분석철학의 발전에 따라 극복된 이론도 있다. 후기 저작에는 같은 문제가 몇 번이나 중복해서 언급되고 있는가 하면 사고에 대폭 수정을 가한것도 있다. 1세기에 가까운 연구 생활을 통해 불변의 일관성이란 과연 미덕인가? 그렇지 않다면 비생산적인 경직성(硬直性)의 표현이라고 할 것인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러셀은 자기 철학의 방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이제 다시 나는 진리란 사실과의 관계에 있어서 성립하는 것이고 사실이란 일반적으로 비인간적인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주적으로 보면 인간은 중요한 것이고, 현재와 이곳을 왜곡되지 않게,우주를 공평하게 바라보는 존재라면 - 그런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고 - 무릇 인간의 일은 한 권의 끝부분에 가까운 각본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나는 새삼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지금까지 인간의 영역을 그 있어야 할 장소로부터 추방할 생각은 없다.  지성이 감성에 혼합되고, 플라톤의 이데아계(界)만이 실재계의 길을 열어 준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더우기 감성과 그 위에 구축된 사상이란 감성을 이탈한 사상에 의해서 도피할 수 없는 뇌옥이라고 생각되고 있으나 말할 것도 없이 그렇게는 생각지 않는다. 감성과 그 위에 구축된 사상이란 뇌옥 같은 것이 아니고 창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라이프니쯔의 모나드(단자) 처럼 세계를 비칠 수가 있어서 가능한 한 모습을 왜곡하지 않는 거울이 되는 것만이 철학자의 의무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우리들의 본성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왜곡을 확인하는 것도 철학자의 의무이다. 그런 왜곡 속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이곳과 현 시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유신론자라면 신에게 돌아가야 할 광대한 공평성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만한 공평성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방향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여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목표에의 길을 안내하는 것만이 철학자의 지고(至高)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버트런드 러셀의 인생

  •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지만, 미래를 바꿀 수는 있다." (We cannot change the past, but we can change the future.)
  • "모든 문제는 새로운 눈으로 볼 때 더욱 명확해진다." (All problems become smaller if you don't dodge them but confront them.)
  •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만, 준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It is difficult to predict the future, but it is not difficult to prepare for it.)
  •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The greatest challenge to any thinker is stating the problem in a way that will allow a solution.)
  • "진리를 말하면 그것은 항상 단순하다." (The truth is always a simple thing.)
  • "관점이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 (When you change your point of view, the whole world changes.)
  • "성공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 실패는 결코 치명적이지 않다. 용기를 가지고 계속 나아가야 한다." (Success is never permanent, and failure is never fatal. Courage is what counts.)
  • "이성과 사랑은 서로 상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서로를 보완하는 것이다." (Reason and love are not in conflict; rather, they work together.)
  • "진리를 찾으려면 먼저 미신과 오해를 버려야 한다." (To find truth, you must discard superstition and prejudice.)
  • "생각은 자유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생각할 수 있다." (Thought is free. You can think whatever you w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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