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빈처(貧妻) (1921) 현진건(玄鎭健)(1900~1943)

지적허영 2023.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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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중국 유학파로, 조선일보를 거쳐 동아일보 사회부장이 되었 다. 동아일보 재직 시 손기정(孫基禎)(1912~2002)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일장기(日章旗) 말살 보도 사건과 관련 해 1년간 복역한다. 그 후 자하문(紫霞門)[창의문(彰義門)] 밖에서 양계(養鷄)하다 실패하면서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

'창의문(彰義門)' 뜻은 '올바른 의(義)를 드러내는(彰) 문(門)'으로, 조선 초 개국공신 정도전이 지었다고 한다. 창의문은 북문이면서도 정북방이 아니라 서북쪽에 있는데, '의(義)' 자는 전통적으로 서쪽을 가리켰기 때문에[4] 창의문 이름 뜻을 '서쪽을 밝게 하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별칭으로 '북소문(北小門)', '자하문(紫霞門)'이 있다.

'북소문(北小門)'은 말그대로 '한양도성의 북쪽(北) 소문(小門)'이란 뜻이며, 자주 불리진 않았다.

'자하문(紫霞門)' 이름은 '자핫골의 문'이란 뜻이다. '자핫골' 지명은 한양 천도 이후에 창의문 일대의 풍광이 마치 개성의 명승 '자하동(紫霞洞)'과 비슷하여 '자핫골'로 불렀던 것에서 유래했다.

6년 전 16세의 K18세의 아내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식에 목말라 무턱대고 유학을 떠났지만, 가난한 탓에 마음껏 유학 생활도 하지 못한 채 반(半)백수가 되어 돌아온다. 처음에는 처가(妻家) 덕으로 그럭저럭 지낸다. K는 쌀이 있는지 땔감이 있는지 등 가족을 돌보는 일에는 완전히 무관심한 채 오로지 보수 없는 독서와 가치 없는 글만 쓰고 있었고, 아내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친정에 구차한 소리를 해가며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K의 성공만을 마음속으로 깊이 믿고 빌었다.

 

그러나 결국엔 전당포에 맡기고 고물상에 팔만한 가구나 옷가지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면서, 친척 중 유일하게 왕래하는 인물이라곤 동년배인 은행원 T뿐이다. 살 궁리를 하라는 아내의 눈물 섞인 부탁이 백번 지당(至當)한 줄 알면서도,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되레 아내에게 소리를 지르는 날들이 이어진다. 이제 K의 아내는 우두커니 서서 하염없이 먼 산만 바라보거나 멍하게 앉아 있을 때가 부쩍 많아졌다. 아내의 그런 모습과 눈물 머금은 눈을 보는 K의 자책도 그만큼 깊어지면서, 이제 아내마저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생각에 불평하는 K와  K의 그런 말에 그렇지 않다며 우는 아내.

 

장인어른 생신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K와 그의 아내는 처가로 향한다. 길가에 다니는 어느 여자를 보아도 거의 다 비단옷을 입고 고운 신을 신었는데, 아내는 당목(唐木) 옷을 허술하게 차리고 (희거나 붉은 바탕에 푸른 무늬를 놓은, 여자나 아이들이 신던) 청목당혜(靑目唐鞋)를 신은 채 타박타박 걷는 모양이 K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술에 취해 나오면서도 처가에서 잡아준 인력거 비용을 돈으로 주면 책 한 권을 사볼 수 있을 텐데 아깝다고 생각하는 K. 나이 많은 처형(妻兄)은 자기 남편이 밉다며 흉을 보면서도 풍족하고 사치스러운 생활로 모든 아픔을 덮고 위로받으며 생활하고, 또 그 외에 인생 뭐 있냐는 식으로 매우 만족해한다. 그것을 참 가련하다고 여기는 K이지만, 부득이한 경우라 하릴없이 정신적 행복에만 만족하려고 애를 쓸 뿐 기실(其實) K에게는 모든 것이 부족한 게 현실이었다. 다만 어찌할 수 없어 참을 뿐. 아직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무명 작가인 K를, 다만 저 하나[아내]가 깊이 인정해 줄 뿐이다. 그런 아내가 못내 고맙고 미안한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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