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마르크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독일군의 입장에서 다뤘듯이, 여기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을 독일군의 입장에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서부전선 이상 없다」처럼 이 작품 역시 “러시아에서의 죽음은 아프리카에서의 죽음과는 다른 냄새를 풍겼다.”라는 무게감 있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 A Time to Love and a Time to Die(1954)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3년 겨울, 패색(敗色)이 짙던 러시아 전선의 독일군 병장 에른스트 그래버 Ernst Graeber는 2년 만에 3주 휴가를 받고 나와, 예전의 모습을 추억하며 들뜬 마음으로 고향을 찾는다.
“비로소 탈출했다는 느낌, 죽음으로부터 멀어져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게 연합군의 폭격에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과 널려 있는 시체들. 그의 집도 파괴되었고, 부모의 행방마저 알 길이 없었다. 다행히도 부모와 인연이 깊었던 의사 크루제 Kruse의 집은 멀쩡했다. 그러나 그 집에는 크루제의 딸이자 동창(同窓)인 엘리자베트[엘리자베스] 크루제 Elizabeth Kruse만 있었다. 나치당원인 프라우 리자[리저] Frau Lieser 부인의 밀고(密告)로 크루제는 4개월 전 강제수용소로 잡혀갔고, 엘리자베트도 리자 부인의 감시하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를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던 엘리자베트와 그래버는 곧바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둘 다 그 행복이 길어봐야 3주라는 걸 너무 잘 인식하고 있었으면서도...
한 번은 갑작스러운 공습(空襲)에 엘리자베트가 “익숙한 일인데 왜 몸이 떨리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자, 그래버가 “당신이 떨고 있는 게 아니야. 떨고 있는 건 당신이 지닌 생명이지. 그건 용기와는 관계없어. 용기는 자기 몸을 지킬 수 있을 때 솟아나는 거야.”라고 대답한다. 空 빌 공, 襲 엄습할 습
낮에 엘리자베트가 군복 생산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그래버는 부모의 행방을 찾아다녔고, 저녁이면 둘은 함께 시간을 보내고 호텔에서 와인도 마셨다. 전쟁 중인데 너무 사치스러운 건 아니냐는 엘리자베트의 말에 그래버는 답한다.
“엘리자베트, 난 2년 동안 반합(飯盒)으로 음식을 먹었어. 무사히 다 먹을 수나 있을까를 걱정하면서 말이야. 그러니까 이건 사치가 아니야. 그 이상의 것이지. 평화이고 안전이고 기쁨이고 축제야!’ (…) 그것은 필수적인 것을 넘어서는 어떤 불필요한 것, 유용함과는 상관없는 그런 것이었다. (…) 죽음과도 같은 수년간의 혹독한 시련 이후 (…) (사람들에겐 평범한 것들이) 그래버에겐 그 이상의 것이었으며, 다른 삶의 상징이었다.” 飯 밥 반, 盒 합 합(소반 뚜겅), 饌 반찬 찬
군인 가족에게는 국가에서 생활비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래버는, 자신이 복귀하면 홀로 남을 엘리자베트를 위해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나치의 감시하에 있는 은사(恩師) 폴만 Pohlmann을 비롯해 여러 사람을 만나는 과정에서 그래버의 고뇌와 가치관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개인의 책임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걸까요? 명령에 따라 행동했다는 사실 뒤에 간단하게 숨어 버릴 수는 없는 겁니다. (…) 저는 전쟁에 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또한 우리의 노예제도와 살인 집단수용소, 친위대와 보안부, 대량 학살과 비(非)인도적인 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해선 전쟁에 패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렇게 알고 있으면서도 2주 후에 다시 일선으로 가서 전투에 가담한다면, 도대체 저는 어디까지 공범이 되는 겁니까?”
“해답은 없네. (…) 하지만 오직 하나, 믿음은 있어야 하네. 하느님 그리고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선(善)에 관한 믿음.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믿음은 그 진위(眞僞)를 떠나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불완전한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선생님은 그것을 의심하신 적이 없나요?” “물론 있지. 자주. 안 그러면 어떻게 내가 믿음을 가질 수 있겠나?”
모순이고 역설이지만, 의심 없는 믿음은 거짓이라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진정한 믿음은 수많은 의심과 그 과정에서의 고통이 쌓인 결과이다. 흙이 가장 더러운 똥을 마다하지 않아야만, 모두의 생명을 지속시키는 곡식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답을 구하는 것은 결정을 회피 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도 선생님께 실제로 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은 저 자신을 향해 서 물어본 거죠. 종종 다른 사람에게 물어본다는 건 곧 자신에게 물어보는 거니까요.”
나치 친위대의 돌격대장이 된 (그리고 폴만을 감시하는 책임자인) 동창 오스카 빈딩[알폰스 빈딩] Oscar Binding은 전형적인 공무원(公務員)이었다. “자기가 한 일만 책임을 지면 돼. 그것도 명령을 받지 않고 한 행동에 대해서만 말이야. (…)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다하면 되는 거야. 책임 같은 건 없어.” 그런데 며칠 후 필요한 음식과 물자를 구하기 위해 찾아간 빈딩의 집은 폭격으로 산산조각이 났고, 그 집 가정부로부터 빈딩도 사망했다는 말을 듣는다. 필요한 것들을 챙겨서 돌아가는 그래버의 등 뒤로, 가정부는 빈딩이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아마도 모든 사람은 어떤 사람한테는 친절할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사 람에게는 정반대겠지.”
그래버는 폴만을 통해 알게 된 (나치에게 쫓기고 있는) 유대인 요제프 Joseph와 폴만의 집에서 많은 대화를 나눈다다. “(하이에나는 언제나 하이에나인 것처럼) 사람들은 종종 살인자는 언제 어디서나 살인자이고 그 밖에 다른 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존재의 작은 일부분만 동원해도 끔찍한 불행을 퍼뜨릴 수 있습니다. (…) 집단수용소의 대장 중엔 유머를 지닌 사람도 있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동지애를 갖춘 친위 대원도 있으며, 애써 세상의 선한 면만을 보면서 끔찍한 일에는 눈을 감아 버리거나 그것을 일시적이거나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여겨 버리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지요. 그들은 말하자면 탄력적인 양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요제프의 말에 그래버는 거의 고백 또는 참회에 가까운 대답을 한다.
“그리고 두려움에 떠는 인간도 있죠. (…) 제가 복귀하려는 건 그러지 않으면 총살될까 봐 (…) 탈영하면[복귀하지 않으면] 놈들이 부모님과 아내를 집단수용소로 보내거나 죽일까 봐 (…) 저는 복귀할 겁니다. 제 이유가 이유도 아니고 그러면서도 몇백만 명의 군인들이 흔히 내세우는 이유라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당신의 경멸을 받아 마땅합니다.”
복귀하기 전 그래버는 가진 돈을 모두 엘리자베트에게 주면서 당부한다. “내 건 아무것도 사서 보내지 마. 거기는 여기보다 먹을 게 많아. 당신 옷을 사. (…) 조금도 쓸모없고,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 거로.” 그래버는 배웅은 필요 없으니 따라 나오지 말라고 말했지만, 엘리자베트와 그래버는는 기차가 막 출발하려 할 때, 서로를 찾은 둘은 인파(人波)를 뚫고서 (소설의 표지 사진처럼) 뜨거운 포옹을 한다.
복귀하자마자 이미 상황은 더욱 심각해져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기 바빴다. 그사이 그래버는 러시아 포로 4명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조금이나마 여러 면에서 시간을 단축하고자 친위대 출신이자 비밀국가경찰[게슈타포] Gestapo이기도 한 슈타인브레너 Steinbrenner가 포로들을 총살하려 한다.
“슈타인브레너는 완벽한 당(黨)의 산물이었다. 그는 완벽하게 건강하고 완벽하게 훈련을 받았으며 완벽하게 자기의 생각은 없고 완벽하게 비인간적이었다. 자동 기계와도 같은 그에게는 총기 소제(掃除)나 체조나 살인이나 모두 똑같은 일이었다.”
그래버는 공식 명령서가 없다는 이유로 슈타인브레너를 막았고, 둘은 옥신각신 몸싸움까지 벌이다가 결국엔 그래버가 슈타인브래너를 총으로 쏴서 죽인다. 그러고는 포로들을 풀어준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결말[결정]을 내야 한다는 걸 늘 잊고 살아. 그건 우리가 소위 이성(理性)이라는 것과 나란히 선물로 받은 거지.”
하지만 어이없게도 달아나던 포로 중 한 명이 쏜 총에 맞아 그래버가 죽으면서 끝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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