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13 - [철학] -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와 사상과 고백론 Confession 요약(1)
아우구스티누스의에게 있어서〈신학한다〉란〈고백하는〉것이다. 신학이란 신에 관해서 알수 있었던 것을 쓰고 때에 따라서는 모르는 것까지도 안 것처럼 써갈기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과는 정반대이다. 그에게 있어서〈신학한다〉란 신의 말씀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이다. 그러나 신의 빛을 받지 않는다면 신의 말씀에 관해 무엇 하나 진실의 것을 알 수 없다. 따라서 신학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당신을 알려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자에게는 주어진다. 기도하며 얻은 것을 이야기한다. 신에게 감사하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결국 신의 말씀은 신비이다. 무슨 일을 안 후에 알 수 있는 것은〈나는 모른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신의 말씀에 대한 탐구로서의 신학은 〈당신을 알려 주십시오〉라는 기원과 〈신의 말씀의 한량없음이여〉라는 찬탄의 고백으로 끝난다.
아우구스티누스의〈신학〉은 본질적으로〈고백〉이다.
《고백론》의 마지막 3권은 그것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마지막 3권이〈고백론〉전체 중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는 밝혀졌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면 고백과 말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참회〉란 단지 마음 속에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함으로써 만은 성립되지 않으며, 그것을 누구에게 말로 표현해야만 한다. 마음 속으로 믿고 있는 것만으로는신앙의 고백이 될 수 없으며, 믿고 있는 것을 말로 표현해야만 한다. 이것은 어떤 형태의 고백에서도 같으며, 고백에 있어서 말과의 관계는 본질적이다. 〈말〉은 타인에게 자기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필요하며 〈말하다>란 누구에게 이야기함을 의미한다. 그 〈누구〉는 말을 이해하는 자라야 한다. 고로〈고백〉은 고백받는 자를 전제로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면 이《고백론》이란 책에서 누구에게 그리고 무엇 때문에 고백하는가가 문제가 된다.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은 《고백론》속에서 어떤 구절에서는 〈나는 당신(神)에게 고백한다〉고 하고, 또 어떤 구절에서는 〈나는 사람들에게 고백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어느 편이 정말인가? 양쪽이 다 정말이라고 한다면〈신에 대한〉 고백과 〈사람들에 대한〉 고백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가 문제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에게 고백하고 있나?
요컨대 아우구스티누스는《고백론》에서 〈신 앞에서 사람들에게 고백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분명히 이 책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을 향해 이야기하고 있다. 신은 〈당신〉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죄의 고백도 감사의 고백도 찬미의 고백도 모두가 신을 향해서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면 왜 아우구스티누스는《고백론》이라는 책을 썼는가라는 점이다. 신은 전지하므로 인간이 말로 이야기하기 전에 인간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실 것이다. 하물며 신에게 고백하기 위해 굳이 글로 써서 책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따라서 고백의 상대가 오직 신뿐이라면 고백을 쓸 필요가 없다. 쓰는 이상은 읽는 인간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신뿐만 아니라 인간도 역시 상대로 하고 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에게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고백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 자신도 인정하고 있으며 〈나는 당신 앞에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라고 말한다. 따라서《고백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을 향해 고백함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고백하고 있는데, 그 관계가 어떻게 되는가, 즉 어느 것이 주대상(主對象)일까? 해석에 따라서는 인간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주이다. 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문학형식이다. 분명히 근대문학에서는 1인칭 형식으로 독자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형식을 사용하기 위해서 신을 대화의 상대로 끌어냈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근대적 해석이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의도에 어긋난다. 비록《고백론》이 뛰어난 문학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그 자신은 문학 작품을 만들 작정으로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이 책 속에서 되풀이되는 기도는 기도라는 문장 형식이 아니고 진실한 기도이다. 그는 〈기도〉를 기교로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을 기도하면서 쓰고, 쓰면서 기도하고 있다.
고로 이 책에 있어서의 고백의 대상은 정말 신이다. 그는 책속에서 사실 신을 향해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인간들에게 고백한다〉와 〈신에게 고백한다〉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책을 쓴 것은 자기 변명을 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었다. 또한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가 신부에게 고백하는 식으로 자기 죄를 용서받기 위해 참회하는 것도 아니다. 요컨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책을〈자기 때문에〉쓴 것은 아니다. 하기야 책에서 그는 자기에 관해 쓰고 있지만 그것은 자기를 위해서는 아니다. 그러면 누구를 위해서인가?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그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를 모든 사람들 앞에 내던지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나의 형제들 때문이다. 내가 범한 죄를 듣거든 나를 위해 슬퍼해 다오. 나의 구원을 듣거든 그러한 은혜를 주신 것을 찬양해다오. 이렇게 해서 슬픔과 찬양의 소리가 나를 에워싸고 서 있는 사람들의 입으로부터 나와 높이 하늘까지 올라가기를」
즉 여기서 그가 자기의 선과 악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라는 한 인간의 고백을 듣고, 사람들은 인간이란 그 얼마나 가엾은 존재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도 버리지 않는 신의 연민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스스로 깨닫게 된다. 또 신을 알고 찬미하게 한다. 따라서《고백론》은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신에 대한 찬미의 책인 동시에, 사실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에 찬미를 유도하려는 목적으로 쓰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여기서 〈자기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참회나 자기 변명이나 자기 도취나 자기 선전을 위해서가 아니다. 자기를 하나의 예로서 여러 사람 앞에 내놓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동정하는 사람도 있겠고 비웃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감수한다. 〈오직 사랑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를 가엾이 여기고 신을 찬양할 것이다〉그는 오직 사람들의 사랑에 기대한다. 그러면 이와 같이 자기를 하나의〈예〉로 삼아 사람들 앞에 내놓는 것이 어떻게 해서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될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 앞에서 사람들을 향한 고백
「나와 같은 죄인에게 베풀어진 신의 연민을 알고, 사람들은 용기를 낼 것이다. 절망하지 않게 될 것이다.」이렇게 보면 신에 대한 고백이 어떻게 해서 인간에 대한 고백이 되는지 그 관계가 분명해진다. 인간에 대한 고백을 명령하시는 분은 사실은 신 자신인 것이다. 인간이 신을 향해 죄를 고백하고 연민을 고백하고 찬미를 고백할 때 신 자신이 그에게 명령한다. 이렇게 명령하는 것이다. 「그 고백을 길잃은 사람들에게도 알려라. 너와 같은 죄인, 약자, 길잃은 자들이 결코 절망하지 않도록, 용기를 내도록, 주에게 기대하도록 그리고 언젠가 네가 지금 하고 있듯이 입을 모아 나를 찬미하도록! 가서 사람들을 향해 그대의 고백을 사람들에게 기하라」. 그리하여 신에 대한 고백은 사람들을 향한 고백이 되어 이와 같은 한 권의 책이 된 것이다. 이 책의〈신 앞에서 사람들을 향해서 한 고백〉이라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끝으로 몇가지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오해를 풀어보자
젊은 아우구스티누스는 불량자였나?
첫째 〈젊은 아우구스티누스〉라 하면 세상 사람은 무지막지한 불량자로 생각하기 일쑤이나 실은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의 청년 시절 정도의 방탕은 그 당시의 아프리카의 여러 조건(로마 본국은 말할 것도 없이)에서 볼 때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는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가 16세에 동거하기 시작한 신분이 천한 여성에 대해 부모나 친구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5년간 그의 말대로 〈규방(閨房)의 의리〉를 지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마니교의 관계
둘째 그 무렵에 마니교에 입신(入信)했는데, 마니교란 무엇인가? 그것은 페르시아의 마니란 사람이 창시한 종교로서, 그 근원은 조로아스터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빛과 어둠을 중심으로 한 이원론적 종교이다. 세계는 빛과 어둠이 대립 항쟁하는 장소이다. 세계의 종말에 빛이 어둠을 정복하지만, 그때까지 양자의 대립은 계속된다. 모든 선한 것、정신적인 것은 빛에 속하며 모든 악한 것 물질적인 것은 어둠에 속한다. 영혼이 육체 속에 있는 것은 빛이 어둠 속에 있는상태이다. 인간의 모든 비참은 인간의 그런 상태에 원인이 있다. 고로 인간에게 있어서 구제된다는 것은 내재하는 빛인 영혼이 육체로부터 구출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통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선택된 자만이 깨끗한 생활에 의해 구제를 성취한다. 신자는 성자의 설교를 듣고 성자가 행하는 비의에 참여하고 그를 공양함으로써 성자를 통해구제된다는 것이다. 또 마니든 그리스도든 인간의 영혼을 육체로부터 구제하기 위해 이승에서 온 빛의 아들이며 그본질은 정신이며 그 자신은 가신(假身)에 불과하다. 만물은 하나의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구약의 신은 유태인이 섬기는 악마이며 그리스도가 주장하는 사랑의 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자기 교에 끌어들인다. 따라서 구약의 신과 그리스도의 신은 하나라고하는 카톨릭교를 맹렬히 비난했다. 마니교는 그 당시 로마 사회에 널리 전파되어있었다. 그것은 전세기까지 교회에 스며들었다. 그것은 영과 물질과의 절대적 대립을 주장하는 이원론이며 만물을 신의 피조물로 보는 그리스도교(물론 카톨릭교)와는 본질적으로 상극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영육이원론(靈肉二元論)을 제나름대로 해석해서 그리스도교를 끌어들여 스스로 그리스도교라고 칭하고 당시의 민중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사실 아프리카의 마니교는 바울의가르침에 깊게 결부되어 있었다고 한다. 청년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에 입신(入信)한것도 그 당시의 카톨릭교가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신앙을 강요하는 태도에 반항심이 생긴데다 마니교의 이색적이며 이론적인 면이 당시의 청년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당시의 마니교는적어도 과학적인 세계관으로 생각되었고, 그 화려한 의식은 미적인 신비감이 충만해 있었기 때문에마니교의 비합법성에 끌려 들어간 것인지도 모른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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