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비 岳飛 (1103년 3월 24일 ~ 1142년 1월 27일)는 남송 초기의 장군으로 학자로서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1178년 무목(武穆)의 시호를 받았다가 뒤에 충무 (忠武)로 개정되었으며, 1204년 왕으로 추존되어 왕호는 악왕 (鄂王)이 되었습니다.
악비 岳飛 인물 소개와 진회 (秦檜)와 갈등
악비 岳飛 인물 소개
남송 제일의 최정예 군단으로 꼽힌 악비는 조정 내에서도 북벌론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북진하여 잃어버렸던 모든 영토를 수복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주화파 (主和派)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당시 남송 조정에서는 재상인 진회 (秦檜)가 금나라 와 화평론 (和平論)을 주장하였으며 연일 승전보를 알려오는 악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주전파 (主戰派)인 군벌들과 이상파 (理想派)의 관료들 사이에 분쟁이 지속되었고, 1141년 금나라와 강화를 주장하였던 재상 진회는 군벌끼리의 불화를 틈타서 그들의 군대 지휘권을 박탈하고 소속 병사들을 모두 중앙군으로 개편하게 됩니다.
1141년 조정의 군제 개편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악비는 무고한 누명을 쓰고 양자 악운과 악가군의 최고 간부인 장헌과 함께 투옥된 뒤 살해되게 됩니다.
악비와 진회 사이의 갈등
악비와 진회 사이의 갈등은 주로 남송의 대외 정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악비는 주전파 (主戰派)의 일원으로, 금나라에 대한 저항을 주장하고, 북진하여 잃어버렸던 모든 영토를 수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진회는 주화파 (主和派)의 지도자로, 금나라와 화평론 (和平論)을 주장했습니다. 악비가 연일 승전보를 알려오면서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진회는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에 따라 진회는 금나라와의 밀약을 통해 악비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게 되었습니다. 감찰어사인 만사설 (萬俟卨)을 이용해 악비의 죄목을 날조하고, 신하들을 움직여 조정에 상소를 올려 악비를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이에 악비는 관직을 내놓았지만, 진회는 이에 멈추지 않고 악비를 모반 (謀反)으로 몰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악비와 진회 사이의 갈등은 그들의 대외 정책 차이와 개인적인 경쟁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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