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한 발전에 관한 위대한 약속이 실현되지 못한 이유들
'무궁한 발전에 관한 위대한 약속'은 산업 시대의 개막 이래로 여러 세대에 걸쳐서 희망과 믿음을 지탱해 온 토대였다. 인간의 문명은 인간이 자연을 능동적으로 지배하면서 시작되었으나 산업 시대가 개막 되기 이전까지는 그 지배력에 한계가 있었다. 산업의 발달은 우리에게 확신을 심어주었고다 인간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었다. 사람들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자기 뜻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아니, 최소한 그렇게 느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역시 우선 모든 사람이 부와 안락한 생활을 누리게 되면, 이어서 누구나 무한히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위대한 약속이 실현되지 못한 이유는 산업주의 체계에 내재한 경제적 모순들 외에도 그 체계 자체가 지녔던 두 가지 중요한 심리학적 전제들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삶의 목적은 최대치의 쾌락이며 그것이 '행복' 이라는 전제이다. 즉 행복이라는 것을 인간이 품을 수 있는 모든 소망 또는 주관적 욕구의 충족으로 이해한 점이다. 이것을 '극단적 쾌락주의'라고 부르겠다. 둘째, 체계의 존속을 촉진하는 특성인 무제한적 이기주의, 즉 자기중심주의와 이기심과 탐욕 이 결국엔 조화와 평화로 통하리라는 전제이다.
극단적 쾌락주의
역사적으로 극단적 쾌락주의는 부유한 계층만이 누리며 발전한 것일 뿐, '행복한 삶'에 관한 이론에서는 그 뿌리를 찾을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가 '순수한 쾌락'을 최고의 목표로 보긴 했지만, 그것은 고통의 부재(不在)인 아포니아 aponia와 영혼의 평안인 아타락시아 ataraxia를 의미했을 뿐이다. 공공생활의 잡사(雜事)를 피해 은둔하는 것, 헛된 미신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것, 빵과 물만 마시는 질박(質朴)한 식사에 만족하는 것, 우애를 최고의 기쁨으로 삼는 것 등을 주장했던 에피쿠로스에게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의미에서의 쾌락은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었다. 그런 쾌락 뒤에는 필연적으로 불쾌감이 뒤따르며, 그럼으로써 인간은 그의 참된 목표인 고통의 부재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다. 인생의 목표가 개개인의 소망 충족이라는 주장은 17~18세기에 명백히 표명되었다. '이익' 이라는 말이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이윤을 뜻하게 된, 사랑과 연대감까지 벗어던진 채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이 더 나은 자아를 갖게 된다는 믿음이 확산하기 시작한 바로 그 시기에 말이다. 라 메트리 La Mettrie(1709~1750)는 행복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환각제 복용까지 권장했으며, 사드 Sade(1740~1814)는 잔인한 충동마저도 그런 충동이 엄연히 존재하며 충족되기를 요구한다는 이유로 충족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경제 행위 결정요인의 변화
두 번째 심리학적 전제는 그 이론적 발단부터 오류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드러난 자료들에서도 기만이었음이 확증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제각기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한 계급투쟁도, 세계적 시각에서 보면 국제적 전쟁도 불가피한 것이다. 소유욕과 평화는 서로 배척 관계에 있다. (여기에서 소유는 당연히 공유(共有)가 아닌 점유(占有)를 의미한다) 18세기 이전까지 경제 행위를 주도하는 원칙, 즉 경제 행위의 결정요인은 ‘윤리적 규범’이었다. 그러나 이후 경제 행위는 윤리 및 인간적 가치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경제적 메커니즘의 발달은 인간을 위해서 무엇이 좋은가라는 물음보다는 그 체계의 성장을 위해서 무엇이 좋은가라는 물음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경제체계가 필요로 하는 인간적 자질인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 소유욕 등이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자연적 충동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 제약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인정하려고 들지 않았다.
새로운 사회는 그 발전과정에 새로운 인간의 발전을 반드시 병행해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요인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매우 적대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의 사회경제적 체계, 우리의 생활방식의 특성들이 병적인 요소를 품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이 병든 인간과 병든 사회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른 관점의 논의들도 있다. 즉 인간의 근본적 심리변화에서 경제적 및 생태학적 파국에 맞서는 대안을 모색하는 측면이다. 이 논의는 1968년 유럽의 정계, 재계, 학계 지도급 인사들이 모여 결성한 국제적 미래문제 연구기관인 로마 클럽The Club of Rome에서 나온 두 편의 보고서 (1972년과 1974)에서 찾아진다. 경제적 변혁에 선행하는 조건으로 자연에 관한 새로운 입장과 새로운 윤리라는 의미에서의 근본적인 변화가 들어서야만 인간의 근본 가치와 인간의 성향도 바뀐다는 점을 결론으로 제시한다. 새로운 사회는 그 발전과정에 새로운 인간의 발전을 반드시 병행해야만 가능하다는, 좀 더 학술적인 표현을 쓰자면 오늘날 인간의 성격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만 가능하다는 주장이다.그러나 인간의 마음 안에서의 변화도 과감한 경제적, 사회적 변혁이 일어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이 외부의 변화가 인간 자체에 변화할 기회를 주며, 변화를 이루는 데에 필요한 용기와 상상력을 부여할 것이다.
두 가지 실존양식, 소유양'과 존재양식에 대한 분석 시도
이 책의 중심 주제는 인간의 두 가지 실존양식, 즉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을 분석하는 것이다. 첫째 장에서는 일반적으로 눈에 띄는 두 실존양식의 차이에 대해서 몇 가지 고찰하기로 한다. 둘째 장에서는 독자도 쉽게 자신의 경험과 끼워 맞출 수 있는 일상생활에서의 실례들을 통해서 두 양식의 차이를 제시할 것이다. 셋째 장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그리고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khart(1260~1327) 수사(修士)의 저술에서 발견되는 소유와 존재에 관한 견해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 이후의 장들에서 제시한 것은 나로서도 가장 어려운 과제들이다. 그것은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의 차이를 분석하는 작업으로, 나는 경험적 자료들을 토대로 이론적 결론을 끌어내는 시도를 하기로 한다.
우리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롭게 존재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한다
우리의 눈에는 소유한다는 것이 극히 정상적인 행위이다. 오히려 존재의 본질이 바로 '소유하는 것'에 있어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겨지는 실정이다. 그러나 일찍이 인생의 위 대한 스승들은 소유와 존재의 양자택일에서 그들의 철학적 관점의 핵심을 찾아냈다. 부처는 인간으로서 자기 도야(陶冶)의 최고 단계에 이르려는 사람은 재물을 탐해서는 안 된다고 설법했다. 예수는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냐고 반문했다. 에크하르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자신을 열어서 비우는 것, 자아에 의해서 방해받지 않는 것이 영적인 부와 힘을 얻는 전제라고 가르쳤다. 마르크스는 사치야말로 빈곤과 마찬가지로 큰 악덕이며, 우리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롭게 존재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소유와 존재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체험의 두 가지 형태로서, 그 각각의 양식의 강도가 개인의 성격 및 여러 유형의 사회적 성격 차이를 결정한다.
명사(소유)의 사용 증가와 동사(존재)의 사용 감소
물질적인 것 뿐만 아니라 권력과 명예를 포함해 모든 걸 소유하려는 것이 소유양식이고, 존재양식이란 무엇을 소유하려고 탐하지 않고 기쁨에 차서 자신의 능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고 대상[세계]과 하나가 되려 하는 실존양식을 의미한다. 존재하는 것과 소유하는 것의 차이는 (동양적 사고와 서양적 사고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을 중심으로 여기는 사회'와 '사물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와 소유 가운데 어느 편에 더 비중을 두는가 하는 일반적 추이 현상은 지난 몇 세기 동안 서구 언어에 나타난 (사물을 지칭하는 이름인) 명사의 사용증가와 (과정과 행위를 표현하는) 동사의 사용감소 현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 예로 '나는 생각한다'를 '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고, '나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를 '나는 문제[고통]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럼으로써 주체적 경험은 배제된다. 경험적 '자아'가 그가 소유한 '그것'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나는 (추상적인 단어인) '문제'를 '소유' 할 수 없다. 그것은 소유할 수 있는 성질의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행위의 추상화에 불과한 명사 '사랑'이 인간에게서 분리되어, 사랑하는 인간은 '사랑'에 속한 인간이 되고, '사랑'은 여신으로, 인간의 사랑을 투영한 우상으로 변한다. 이와 같은 소외과정에서 인간은 사랑을 체험하기를 중단하고, 다만 사랑의 여신에게 굴종하는 것에 의해서 자신의 사랑하는 능력과 묶여 있게 된다.
생성과정 becoming과 활동[운동]이 존재의 구성요소이다
존재는 과거 수천 권 철학서의 주제였고,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지금도 서양철학의 근본 문제 중 하나이다. '생성과정' becoming과 '활동[운동]'이 존재의 구성요소이다. 존재는 변화를 함축하고 있다. 생명이 있는 유기체는 생성을 겪는 한에서만 존재 할 수 있으며, 변화하는 한에서만 실존할 수 있다. 생성과 변화는 삶의 과정에 내재한 특성이다. 음식을 섭취하는 경우처럼 뭔가를 몸 안에 끌어들이는 행위는 소유의 원시적 형태 중 하나이다. 유아는 가지고 싶은 것은 무작정 입에 넣는 성향을 보인다. 이것이 소유의 한 형태인 '합체' incorporation이다. 이와 같은 상관관계를 여러 형태의 식인풍습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다른 존재를 먹어버림으로써 그 존재가 지녔던 능력을 내 것으로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소비자들의 태도에는 온 세계를 삼키려는 욕망이 깔려 있다. 소비자는 우유병을 달라고 보채는 영원한 젖먹이이다. 이런 예는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 같은 병리적 현상에서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흡연 역시 일종의 중독이기는 하되 흡연자 자신의 수명을 단축하게 할 뿐, 그의 사회적 기능 능력을 해치지는 않기 때문에 다른 중독과는 구별된다. 소비는 소유의 한 형태이다. 소비는 이중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써버린 것은 빼앗길 염려가 없으므로 일단 불안을 감소시킨다. 한편, 점점 더 많은 소비를 조장한다. 일단 써버린 것은 곧 충족감을 주기를 중단해버리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소비자는 '나 = 내가 가진 것 = 내가 소비하는 것' 이라는 등식에서 자신의 실체를 확인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