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에리히 프롬 Erich Fromm의 소유냐 존재냐 공부하기 2편

지적허영 2023.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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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는 전적으로 소유지향과 이윤추구로 처방된 사회이다. 다음에 서술한 일상생활에서 나온 단순한 실례들은 소유와 존재의 선택적 양식에 관한 독자의 이해를 도와주리라고 생각한다.

일상적 경험에서의 소유와 존재 구분

■ 학습에서의 소유와 존재 구분

소유적 실존양식에 길든 학생들은 강의를 들을 때, 가능한 한 모조리 필기하고 그것을 나중에 (기록된 그대로만) 암기한다. 그 내용은 그들 고유의 사고체계를 풍요롭고 폭넓게 하는 구성요소가 되 지 못한다. (…) 그러나 존재양식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는 학생들은 첫 강의부터 백지상태로 참여하지 않는다. 그 강의가 다루는 주제를 미리 고찰하고 특정한 문제와 의문에 대해서 골몰한다. 그들은 수동적으로 듣지 않고 경청(傾聽)하며, 듣는 데에 그치지 않고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생각한다. 그들이 들은 것은 그들 고유의 사유과정을 자극한다. 경청행위는 그 자체로 살아 있는 과정이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충격을 받고 변화한다. 강의를 들은 후에는 그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 기억에서의 소유와 존재 구분

소유양식으로 기억할 때는 두 낱말이 전적으로 기계적으로 연결되거나 순전히 논리적 연관에 바탕을 두고 연결될 수 있다. '두통'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고통'이나 '아스피린'을 연상했다면, 논리적 인습의 궤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두통'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스트레스'나 '분노'를 연상했다면, 해당 사실을 그 원인에 묶고 있는 존재양식으로서 기억하고 있는 셈이다. 존재적 실존양식에서의 기억행위는 일찍이 보았거나 들었던 것을 소생[상기(想起)]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쉽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충분한 집중력[관심]을 가지고 눈여겨 보아둔 과거의 경험이 전제되어야 한다. 소유양식으로 누군가의 얼굴이나 풍경을 기억하는 방식은 대개의 사람이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사진처럼,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록해놓는 것도 또 다른 형태의 소외된 기억행위이다. 기억하고 싶은 것을 노트에 필기함으로써 그 정보를 소유하기에 이르며, 소유했다는 만족감으로 인해 그 후 그것을 머릿속에 새겨놓으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메모나 참고기록이 전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기억을 대치시키려는 경향은 무분별해 보일 정도로 증가하고 있다. 많은 점원이 두세 자리의 간단한 덧셈조차 암산할 생각은 하지 않고 계산기를 붙들고 씨름한다.

 

■ 독서에서의 소유와 존재 구분

소유양식의 독자는 호기심에 이끌려 소설의 줄거리만을 알고 싶어 한다. 그런 후에는 마치 자기가 전부를 직접 읽은 듯 현실감 있게 이야기 전체를 소유한다. 그러나 그가 획득한 인식은 아무것도 없다. 소설 주인공의 성격과 행동을 파악해 인간의 본성을 통찰하는 능력도 심화시키지 못했고, 스스로에 대해서 뭔가를 깨우친 바도 없다. 대부분 학생은 책을 읽을 때 저자의 사상을 뒤따라서 암기하는 방식을 주입받는다. 고등학교에서 대학교에 이르는 교육수준의 차이는 주로 전수받은 양적 측면에서 드러난다. 우수하다고 인정받는 학생은 과거 철학자들이 말한 경구(警句)를 가장 정확하게 따라 외울 수 있는 학생들이다. 해박한 박물관 안내인과 같다. 이와는 달리 존재양식으로 책을 대하는 독자는 아무리 유명한 저서라도 다소간에 무가치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확신에 이른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며 취사 선택한다. 어쩌면 그는 때로 작가 자신보다 그 책을 더 잘 이해할 수도 있다. 작가에게는 자신이 쓴 것은 모조리 중요하게 보였을 테니 말이다.

 

■ 권위에서의 소유와 존재 구분

요점은 권위를 소유하고 있느냐 아니면 권위로 존재하느냐이다. 권위에는 두 가지, 즉 '합리적 권위'와 '비합리적 권위'가 있다. 능력을 바탕으로 유지되는 '합리적 권위'는 그 권위에 의존하는 사람의 성장을 촉진한다. 권력을 바탕으로 유지되는 '비합리적 권위'는 권력에 굴하는 사람들을 착취한다. 수렵 채집인 사회에서는 그때그때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자로 인정받는 사람이 권위를 행사한다. 그 권능(權能)[능력]이 어떤 자질에 근거해 인정되는가는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경험, 지혜, 관용, 재주, 인격 그리고 담력이 일차적 요인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대체로 지속적 권위는 없고 필요에 따라각기 다른 계기에 따라 여러 권위가 병존한다. 이와 아주 유사한 형태의 권위를 여러 영장류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존재양식의 권위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고도로 자기실현과 자기완성을 이룩한 인간의 인격을 바탕으로 세워진다. 그런 인물에게서는 저절로 권위가 배어 나온다. 그러니 굳이 명령하거나 위협하고 매수할 필요가 없다. 인생의 위대한 스승들은 이와 같은 권위를 지닌 인물들이었다. 이 문제야말로 교육의 중심 문제이다. 만약 부모들이 좀 더 자기를 도야(陶冶)하고 중심을 지킨다면, 권위주의 교육이냐 자유 방임주의 교육이냐 하는 논쟁 자체는 사라질 것이다. 아이들한테는 강요하면서 정작 솔선수범하지 않는 어른들에게 무시당하거나 강요당하면 아이들은 반발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능력에 기초를 둔 권위는 사회적 지위에 기초를 둔 권위에 의해서 밀려나게 되었다. 제복이나 칭호[지위] 같은 외적 징표들이 진정한 능력과 그 능력의 토대가 되는 특질(特質)들을 대신하게 되었다. 왕이라는 칭호를 소유하고 있는 한, 사람들은 그가 왕으로서의 자질들을 지니고 있을 것으로 간주한다. 그뿐만 아니라 일정한 능력을 바탕으로 확립된 권위의 경우에서도 중대한 문제점들이 발생한다. 한 분야에서 유능한 지도자가 다른 분야에서는 무능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떤 정치가는 전쟁을 이끌어가는 데에는 유능해도 평화 시의 정치에는 무능할 수 있다. 정치 생활 초년에는 정직하고 용감했는데, 권력의 유혹에 물들어서 그런 특질들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노령(老齡)이나 육체적 장애가 그의 능력을 감소시켰을 수도 있다. 권위를 소지하면서 그것에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 편에서는 힘없는 자들의 실제적 사고능력, 즉 비판적 사고능력을 마비시켜서 바보로 만들어 자신들 권위의 허구를 믿게끔 심복(心腹)시키려 한다.

 

■ 지식에서의 소유와 존재 구분

존재양식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지식[앎]의 특성에 대해서는 부처,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예수, 에크하르트, 프로이트 그리고 마르크스 등으로 대표되는 사상가들을 떠올리면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보는 앎이란 이른바 상식적 지각이 가져다주는 기만(欺瞞)성을 인식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앎[깨달음]은 미망(迷妄)을 깨뜨리는 것,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비롯된다. 표면을 뿌리까지 뚫고 들어가서, 근원에 이르러 적나라한 현실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진실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표면을 뚫고 들어가서 비판적이고 능동적으로 진실을 향해 가급적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의 스승들이 전념한 문제는 인간의 구원이었고, 그들 모두 사회적으로 인정된 기존의 사고방식을 문제 삼았다. 존재양식의 지고(至高)의 목표는 '보다 깊이 아는 것'인 반면, 소유양식의 지고의 목표는 '보다 많이 아는 것'이다. 학교란 학생들에게 인간 정신이 쌓아온 최고의 업적들을 전달해주는 기관이라고 일반적으로 주장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훗날 살아가면서 확보하게 될 재산이나 사회적 특권에 상응하는 지식의 꾸러미들을 생산하는 공장에 불과한 것이다.

 

■ 신앙에서의 소유와 존재 구분

소유양식에서의 신앙은 아무런 합리적 증거가 없는 해답들을 믿으라고 명령하는 권위에 대한 굴종에 바탕을 둔 확신이다. 이런 종류의 신앙은 남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도식적 틀로 구성되어 있고, 그 타인들에게 굴복하는 탓에 그 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근본적으로 신(神)은 우리가 내면에서 경험할 수 있는 지고(至高)의 가치의 상징이다. 그러나 소유양식에서의 신은 하나의 (가시적이고 소유할 수 있는) 우상이 된다. 소유양식으로서의 신앙은 스스로는 모색할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확신을 원하고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절름발이 인간들을 위한 목발이 된다. 존재양식으로서의 신앙은 특정한 이념들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내적인 성향, 즉 일종의 마음가짐이다. 이 경우에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신앙 '안에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구약성서의 여호와는 무엇보다 우상을,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여러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신은 특정한 이름을 가져서도 안 되며, 신의 복제판이 만들어져서도 안 되고, 신의 속성은 인간의 입에 감히 올릴 수조차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폄으로써 우상화의 위험을 추방하고자 했다.

 

■ 사랑에서의 소유와 존재 구분

우리는 사랑을 소유할 수 있는가? '사랑'이라는 사물은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사랑의 행위'뿐이다. 사랑이란 누군가 또는 뭔가를 배려하고 알고자 하며, 그에게 몰입하고 그 존재를 입증 하며 그를 보고 즐거워하는 모든 '활동'을 내포한다. 그러나 소유양식으로 체험되는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구속하고 가두며 지배함을 의미한다. 남녀가 구애(求愛)하는 기간에는 그 어느 편이나 상대방에 대해서 자신감이 없다. 연인들은 서로 상대방의 마음을 사려고 고심한다. 아직은 어느 쪽도 상대방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양측 모두 존재적 측면에, 다시 말하면 상대방에게 무엇이든 베풀고,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데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결혼과 더불어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한다. 결혼의 약속은 쌍방에게 상대방의 육체, 감정, 관심을 독점할 권리를 부여한다. 이제 그 어느편도 상대방의 마음을 사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사랑은 소유하고 있는 무엇, 하나의 재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권태로워지고, 각자 지녔던 아름다움도 소멸한다. 그들은 흔히 변해버린 관계의 원인을 상대방에게서 찾으려고 들며, 자신이 속았다는 느낌에 젖는다. 사랑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는 그릇된 기대감이 결국 사랑을 정지시킨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조율하며 서로 사랑하는 대신 돈, 사회적 지위, 가정, 자식 등을 공유한다. 따라서 사랑으로 시작된 결혼이 우호적인 공동자산체, 즉 두 개의 자기중심주의가 통합된 '가정'이라는 이름의 법인체로 변질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결혼이라는 형태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사실이 배제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결혼이라는 형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유 지향적 성격 구조에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들이 사는 사회구조에 있다. 그룹 결혼, 파트너 교환, 그룹 섹스 등 현대적 형태의 공동생활 제창자들은 내가 보는 한, 한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기보다는 파트너의 숫자를 늘려서 끊임없는 새로운 자극으로 권태를 물리침으로써 사랑의 난점을 피하려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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