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와 에크하르트 수사의 저술에 나타난 소유와 존재양식
헤브루[히브리 또는 유대] 민족의 역사는 헤브루 최초의 영웅인 아브라함에게 내려진 (고향 땅과 친족을 떠나라는) 여호와의 명령(창세기 12:1)으로 시작한다. 아브라함은 그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버리고 미지의 곳으로 가야만 했다. 두 번째 영웅은 모세이다. 그 역시 그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끌고 광야[황야]로 나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광야는 이 해방에서 핵심적인 상징이다. 그곳은 바로 (자유로운 삶의 상징인) 유목민의 땅이고, 유목민은 생계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을 소유한다. 헤브루인들은 이집트의 안락한 생활로 되돌아가고 싶어 한다. 가진 것 없는 광야 생활의 불확실성을 두려워하자, 신은 이들을 불쌍히 여겨 아침에는 빵을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규칙이 덧붙는다. "저마다 먹을 만큼씩만 거둬들여라" 라는 것이 첫 번째 계율이다. 마르크스가 지향한 공산주의의 "저마다 필요에 따라" 라는 원칙이 이미 여기에서 최초로 공식화된 것이다. 두 번째 계율은 "내일을 위해서 남겨두지 말라" 는 것이다. 안락함과 탐욕과 소유 지향에 대한 경고이다. 여기에서 '안식일' [샤바트Shabbat] sabbath를 지키는 의식이 도입된다. 안식일의 역할은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에 완전한 조화를 재수립한다는 의미에서의 '평온함' 을 뜻한다. 어떤 것을 파괴하는 것은 물론 새롭게 짓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 그런 평온함 말이다. 안식일은 자신의 본질적인 부분에 힘을 쓰기 위해서 사는 것, 즉 오로지 기도하고 연구하며 함께 먹고 대화하며 사랑하는 날이다. 이날은 인간이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날이기 때문에 기쁨의 날이다. 탈무드에서 안식일을 메시아 시대의 예행(연습)이라고 부르고, 메시아 시대를 중단 없는 안식일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그러나 현대의 일요일은 즐기는 날, 소비의 날,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는 날이 되어버렸다.
산상수훈(산상설교)은 위대한 노예반란 성명서였다
**산상설교: 30년 경에 그의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설교한 일을 뜻하는 기독교 용어로 산상수훈이라고도 한다**
성경과 탈무드 두 원전(原典)을 채운 정신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려는 정신으로, 가난한 이들을 보호하고 과부나 소수민족 같은 모든 약자를 도와주는 것이었지만 대체로 부(富)를 악으로 비판하거나 존재 양식과 화해할 수 없는 것으로 평가하지는 않았다. 반면 초기 기독교도들은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추방당하고 박해받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세속적 권력이거나 성직의 권력이거나를 막론하고 권세와 부를 타협할 여지가 없는 악으로 단정했다. 막스 베버가 지적했듯이, 산상수훈(山上垂訓 Sermo montanus)(마태복음 5장~7장)은 사실상 위대한 노예반란의 성명서였다. 초기 기독교의 혁명정신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참고한 복음서에서 가장 오래된) 'Q 텍스트'에 명백히 드러나 있다. 'Q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자기 권리를 근본적으로 포기할 것(마태복음 5:39~42)과 원수를 사랑하라(마태복음 5:44~48)는 요청은 구약성서의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레위기 19:18)는 계율보다 더 투철하게 타인에 대해서 완전히 책임질 것과 일체의 이기심을 버릴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의 소유에 관해서도 일체의 단념(누가복음 12:33)이 요청된다. 이와 같은 정신으로 예수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 것" (마태복음 5:3/누가복음 6:20)이라고 말했다.
예수는 존재의 구현이며 소유하지 않는 것이 존재양식의 전제라는 이념의 구현이다
'최후의 심판'이라는 묵시록적 표상은 당시 유대교에 퍼져 있던 메시아 사상에서 나온 것으로서, 최후의 심판과 구원에 앞서서 멸망과 혼돈의 시기가 오리라는 비전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독교에 새로운 점이 있다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그런 멸망과 혼돈의 시기가 이미 닥쳤다고 또는 눈앞에 다가왔다고, 예수의 출현과 더불어 이미 그 시기(멸망과 혼돈)가 시작되었다고 믿었던 점이다. 초기 기독교도들은 권세와 명성이 그 절정에 치솟아 있던 로마 제국의 한 귀퉁이에서 살고 있었다. 세계의 파국이 임박했다는 전조(前兆)는 아무 데에도 없었다. 현실적으로는 그들의 확신이 오류임이 드러났다.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는 예수의 이야기(마태복음 4장/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와 마귀는 대립적인 두 원칙을 대표한다. 마귀는 물질적 소비와 자연 및 인간을 지배하는 힘의 대표자이고, 예수는 존재의 구현이며 소유하지 않는 것이 존재양식의 전제라는 이념의 구현이다. 존재를 지향하기 위해서 소유지향을 거부하는 식의 윤리적 엄격주의는 에세네파나 1947년에 발견된 사해문서를 낳은 유대인들 교단에서도 발견된다. 그리고 이 전통은 기독교 역사 전반에 걸쳐서, 재산을 가지지 않고 청빈하게 살겠다는 맹세에 기초한 수도회에서 계승해왔다. 공산주의적 종파에 공공연하게 맞섰던 토마스 아퀴나스조차도 사유재산제도란 그것이 만인의 복지를 가능하게 하는 목적에 최대한 이바지하는 한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고전 불교는 욕망을 끊는 것, 자신의 자아, 영속하는 물질, 심지어는 자기완성에의 욕구까지를 포함한 일체의 소유욕을 단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구약이나 신약성서보다 훨씬 더 투철하게 강조하고 있다.
**에세네파는 제2성전기에 사두개파, 바리새파와 함께 형성된 유대교 유파로 BC 2세기에 형성되어 기원 후 1세기에 사라졌다**
소유양식으로서의 지식과 (근원을 통찰하는) 인식의 행위에는 차이가 있다
소유적 실존양식에 대한 에크하르트의 견해가 나타나 있는 원전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 (마태복음 5:3)이라는 성경 구절을 바탕으로 한 가난에 관한 그의 설교이다. 이 설교에서 에크하르트는 '심령의 가난함' 이란 외적 빈곤, 즉 물질적 빈곤이 아님을 밝힌다. 그는 내적 빈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가 가난 한 사람" 이라는 것이다. 부처는 욕구를 삶의 기쁨의 원천이 아닌 인간적 고뇌의 근원으로 보았다.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의지'란 인간이 그것에 의해서 휘둘리는 '욕구'와 동류(同類)의 것으로, 엄밀히 보면 의지가 아니다. 더 나아가 신의 뜻을 따르는 것조차 원하지 않도록 요구한다. 그것 역시 일종의 욕구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욕구를 가지지 않는 사람이다. 이것이 '비집착[초연함]'이라는 에크하르트적 개념의 요체이다. 나아가 신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신을 인식하는 편이 더 낫다고 강조한다. "사랑은 욕구와 욕망을 일으킨다. 반면에 인식은 그 어떤 생각도 첨가하지 않으며, 오히려 욕구를 떨쳐내고 스스로 그것에서 떨어져나와서 신 앞으로 달려가 알몸으로 신과 접촉하고 자신의 존재 안에 신을 끌어안는 것이다." '아무것도 알아서는 안 된다'는 표현에서 에크하르트가 뜻하는 바는 소유양식으로서의 지식과 (사물의 근원까지 파고들어서 그 원인을 통찰하는) 인식의 행위의 차이점이다. 어떤 '특정한 사상의 소유'와 '사유의 과정'을 명백히 구별하는 것이다. "지금껏 우리는 인간은 모름지기 자신을 위해서나 진리를 위해서나 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거듭 말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말하고자 한다. 이런 가난을 가지려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나 진리를 위해서나 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신이 자기 안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인식하지도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그렇게 모든 지식을 비워야 한다." 우리는 지식으로 채워져서는 안 되며, 지식에 매달리거나 그것을 탐해서도 안 된다. 지식이 도그마의 특성을 취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은 소유적 실존양식에 속해 있다. 존재양식에서의 지식은 곧 파고드는 사유행위 그 자체이다. 확신을 획득하고자 멈추어 서려는 욕망을 절대 느끼지 않는 그런 사유행위이다.
능동적 활동이란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의 가난이란, 인간이 신으로부터 그리고 일체의 신의 작업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고 그래서 신 스스로 그 마음 안에서 활동하고자 뜻하시어 바로 신 자신이 활동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여, 그대 자신이 신께서 활동하는 장소가 될 수도 그 장소를 가질 수도 없을 만큼 그렇게 가난해질지어다!" 그렇다고 이것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고 아무런 행위도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행하는 것에 (심지어는 신에게조차) 묶이고 속박당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우리의 목표는 아집과 아욕, 다시 말하면 소유적 실존양식에서 벗어나서 완전한 존재에 도달하는 것이다. 소유적 실존양식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소유하는 여러 대상물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인간의 전반적인 마음가짐이다. 그 무엇이든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들에 집착할 때, 그리하여 그것들이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족쇄가 될 때, 그것들은 우리의 자기실현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행할 것인가이기보다는,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위를 받치고 있는 근본이다. 우리의 존재는 실재이며, 우리를 움직이는 정신이요, 우리의 행동을 규정하는 성격이다. 존재는 삶이며 활동이요, 탄생이며 재생이고, 흘러나와서 흘러가는 것이며, 능동적 생산활동이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는 소유, 아집, 아욕의 반대개념이다. 능동적 활동이란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생기있게 활동하는 사람은 채워짐에 따라 커져서 결코 가득 차지 않는 그릇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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