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에리히 프롬 Erich Fromm의 소유냐 존재냐 공부하기 5편

지적허영 2023.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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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는 '사물'과 관계하며, 사물이란 구체적이며 묘사할 수 있는 것이다. 존재는 '체험'과 관계하며, 체험이란 원칙적으로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다.

 

존재양식은 언어가 아닌 체험을 통해 전달 가능하다

존재적 실존양식의 전제 조건은 '독립'과 '자유' 그리고 '비판적 이성'을 지니는 것이고, 가장 본질적인 특성은 (겉으로 보기에 바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을 생산적으로 사용한다는 의미에서의 내면적 활동상태를 뜻하는) '능동성'이다. 이 활동상태는 자기를 새롭게 하는 것, 자기를 성장시키고 흐르게 하며 사랑하는 것, 고립된 자아의 감옥을 초월하며,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이며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경험들은 그 어느 것도 언어로서 완전히 재현될 수 없다. 언어란 우리의 체험을 채워 넣는 그릇이기는 하지만, 체험을 완전히 담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체험이란 일단 사상과 언어로 옮겨지는 순간 증발해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존재양식은 언어로는 묘사할 수 없고 오로지 체험을 공유함으로써 전달 가능한 양식이다. 푸른색 유리가 푸르게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푸른색을 제외한 다른 색깔을 모두 흡수해서 꼭꼭 간직한 채 통과 또는 반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푸른색만 자유롭게 통과시키거나 반사해서 우리 눈에 들어오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유리를 보고 푸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유리가 푸른색을 품고 있지 않은 데에 기인한다. 우리가 유리를 푸르다고 부르는 근거는 유리가 '소유'한 것에 있지 않고, '방출'한 것에 '통과'시킨 것에 '반사'한 것에 '주위에 나눠 준 것'에 '버린 것'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의 경우 재산과 소유라는 목발을 던져 버리면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능력을 써서 혼자 힘으로 걷기 시작할 수 있다는 진리를 터득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을 망설이게 하는 것은 자기는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없으리라는, 만약 재산과 소유라는 목발이 지탱해주지 않으면 쓰러져버릴 것이라는 그릇된 환상이다.

단순 분주함과 생산적 활동의 차이

현대적 언어 사용에서 '능동성[활동성]' 이란 '에너지를 써서 눈에 보이는 효과를 노리는 태도'로 정의된다. 다만 단지 태도에만 상관될 뿐, 그 태도를 지닌 인물과는 그리고 그런 태도를 지니게 된 과정과는 무관하다. 즉 '활동'과 단순한 '분주함'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활동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소외된 활동'과 '소외되지 않은 활동' 사이의 구별과 같은 것이다. 소외된 활동을 할 때 나는 나 자신을 행위의 주체로 체험하지 않고 나의 활동의 결과로 경험한다. 근본적으로 행동의 주체는 나 자신이 아니고, 내적 혹은 외적 힘이 나를 통해 행동한다. 가장 명백한 예는 최면 과정에서 볼 수 있 다. 최면상태에서 어떤 지시를 받은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결단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고 최면사의 지시를 따른 것임을 의식하지 못한 채, 최면에서 깨어난 후에도 그 지시를 수행한다. 소외되지 않은 활동의 경우, 나는 나 자신을 행동의 주체로 체험한다. 이런 소외되지 않은 활동을 '생산적 활동' 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여기에서 '생산적' 이라는 말은 어떤 새로운 것이나 독창적인 것을 창조하는 능력과는 무관한 것이 며, 따라서 예술가나 과학자의 창의성과 동의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경우에 중요한 것은 활동의 산물이 아니라 활동의 질(質)이다. 스스로를 깊이 의식하는 사람, 나무 한 그루라도 그냥 지나쳐서 보지 않고 진정으로 오래 관찰하는 사람, 한 편의 시를 읽고 시인이 표현한 느낌들을 뒤따라서 느낄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비록 그 어떤 창조와 연결되지 않는다고 해도 생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산적 활동' 이란 '내면적 능동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것이 굳이 어떤 예술작품이나 과학적 업적 또는 유용한 무엇과 묶일 필요는 없다.

존재적 실존 관점에서의 스피노자와 마르크스

한 인간으로서 사상가로서 스피노자Baruch Spinoza(1632~1677)는 그가 살았던 시대보다 약 4세기 전인 에크하르트 시대에 통용되었던 가치들을 구체화한 인물이다. 스피노자의 「윤리학」(1677)에 의하면 '활동성⋅이성⋅자유⋅행복⋅기쁨⋅자기완성'은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 있으며,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에 반(反)하는 모든 성향인 '수동성⋅불합리성⋅속박⋅슬픔⋅무력감'도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 있다. 스피노자가 보는 정신적 건강은 궁극적으로 올바른 삶의 발현이며, 반면 정신적 질병은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바에 부응하지 못하는 삶의 징후이다. 마르크스Karl Marx(1818~1883)는 「경제학-철학 초고」(1844)에서 "자유롭고 의식적인 활동은 인간이라는 종(種)의 특성" 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노동은 인간의 활동을 대표하며, 인간의 활동은 곧 삶이다. 반면에 마르크스에게 자본은 축적된 것, 궁극적으로 죽은 것이다. 마르크스가 품었던 '노동과 자본' 간의 투쟁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그것이 그에게는 생존과 죽음, 현재와 과거, 인간과 사물, 존재와 소유의 싸움이었음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주의에 대한 마크스의 전면적 비판과 사회주의에 대한 희망적 환상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인간의 능동성이 마비된다는 것, 따라서 인류의 목표는 삶의 모든 분야에서 능동성을 회복함으로써 인간에게 완전한 인간성을 되돌려주는 것이라는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수의 인간은 소유적 및 존재적 실존양식을 모두 가지고 있다

현대 사회는 소유적 실존양식은 인간의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사실상 그 점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생각을 출발점으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본성적 요구에 부응하는 점을 사회제도에 투영시킴으로써 우리의 사회제도가 가치 있다고 입증하려는 소망의 표출일 뿐이다. 실제로는 소유적 및 존재적 실존양식 모두 인간의 본성에 잠재해 있는 가능성이다. 인간의 내부에는 두 가지 성향이 있다. 그 하나는 소유하고자 하는, 자기 것으로 하려는 성향으로서 궁극적으로 살아남고자 하는 생물학적 소망에서 뻗어 나온 힘이다. 다른 하나는 존재하고자 하는, 나눠 가지고 베풀고 희생하려는 성향으로서 인간실존 특유의 조건에서, 특히 타자와 하나가 됨으로써 자신이 고립을 극복하려는 타고난 욕구에서 나온 성향이다. 그러나 양극단의 형태는 극소수라는 점, 압도적 다수의 인간에게는 이 두 가능성이 공존한다는 점, 그리고 어느 쪽이 우세하며 어느 쪽이 억압당하고 있는지는 환경적 요인에 달려 있다는 점 등을 가설로 세울 수 있다. 나의 이 가설은 널리 유포된 정신분석학상의 정설, 즉 환경은 유아기와 초기 아동기에는 성격발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만, 이 시기가 지나면 성격이 고정되어서 외부적 영향에 의해서는 거의 바뀌지 않는다는 주장과는 어긋난다. 하지만 대부분 인간의 경우 대체로 그가 사는 사회적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 탓에 유아 시절의 기본 조건이 그 후의 생의 시기에도 그대로 존속할 뿐이다. 따라서 실제로 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행동의 근본적 변화를 초래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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