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란 소유적 존재를 탈피한 사람들이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미 지의 것, 불확실한 것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데에 불안을 느끼며, 그래서 그렇게 하기를 피한다. 옛것, 이미 겪어본 것만이 안전하다. 아니, 최소한 안전한 듯하다. 새로 내딛는 발걸음은 실패의 위험을 감추고 있고, 이것이야말로 왜 사람들이 ‘자유’를 두려워하는가 하는 이유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렇듯 소유가 주는 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로운 것에 대한 비전을 지니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사람들, 앞으로 내디딜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찬양하고 감탄한다. 신화에서는 영웅이 이런 실존방식을 구현하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영웅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버릴 수 있는 그리고 물론 두려움은 있더라도 그 두려움에 굴하지 않고 낯선 곳으로 떠날 용기를 지닌 인간이다. 석가모니가 그랬고,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가 그랬다. 심지어 동화 속의 영웅도 이와 같은 이상(理想)에 부합된다. 동화의 주인공은 고향을 떠나서 앞으로 나아가며 불확실성을 감내한다. 우리가 이런 영웅들을 찬탄(讚歎)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우리도 그 길로 접어들 수만 있다면) 우리의 길도 그들이 걷는 길과 같아야 한다는 느낌이 자리 잡고 있 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고 영웅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영웅은 우상이 된다. 전진할 수 있는 우리의 잠재력을 그에게 떠넘기고, 우리 자신은 있는 그 자리에 머문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영웅이 아니게 된다.
존재는 실천을 통해 증대한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돈, 특권, 자아, 요컨대 그들 자신의 외부에 있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 그렇게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잃을 때, 그들은 어떻게 될까? 재산은 잃을 수 있는 것임이 명약관화(明若觀火) 하며, 재산의 상실과 더불어서 지위와 친구도 잃기 마련이고, 또한 생명마저 어느 순간에라도 잃을 수 있는 것이며, 언젠가는 반드시 잃기 마련이다. 소유하고 있는 것이란 동시에 언제라도 잃을 수 있는 것이므로,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잃을세라 도둑을 겁내고, 경제적 변동을, 혁명을, 질병을, 죽음을 두려워할뿐더러, 사랑하는 행위에도 불안을 느끼며, 자유, 성장, 변화, 미지의 것에 대해서도 불안해하고 두려움을 갖는다.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에 떠밀려서 방어적으로 되며 가혹해지고 의심이 많아지고, 결국 외로워진 다. 가진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위험에서 생기는 불안과 걱정은 존재적 실존양식에는 없다. 나는 존재하는 자아일 뿐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누구도 나를 앗아가거나 나의 안정과 나의 주체적 느낌을 위협할 수 없다. 소유는 사용에 따라서 감소하는 반면, 존재는 실천을 통해서 증대한다. 이성의 힘, 사랑의 힘, 예술적 및 지적 창조력 등, 이 모든 본질적 힘은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불어난다. 베푸는 것은 상실 되지 않으며, 반대로 붙잡고 있는 것은 잃기 마련이다. 존재적 실존양식에서의 유일한 위협은 자신의 내부에 있다. 자기의 생산적 힘에 대한 신념의 결여에, 퇴보적 성향에, 내면적 게으름에, 자기 삶에 관한 결정을 타인에게 떠맡기려는 것에.
사랑하고 좋아하고 즐기면서도 그것을 굳이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 체험은 사실상 쉽지 않은 일이다. 소유지향에 근본을 둔 관계는 억압과 부담을 주며, 갈등과 질투로 채워지게 된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소유적 실존양식에 근거한 인간관계는 ‘경쟁심, 적대감, 두려움’으로 특징지어진다.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 간에도 해당한다. 나의 소유가 곧 나의 존재이기 때문에,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필연적으로 많이, 더 많이, 최대한으로 소유하려는 욕구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바꿔 말하면, 탐욕은 소유지향의 당연한 결과이다. 그의 탐욕을 부채질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아무리 가져도 그는 만족할 수 없다. 배고픔처럼 생리적 조건의 한계를 가진 육체적 욕구와는 달리, 정신적 탐욕은 아무리 채워도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 계급투쟁은 비교적 온건한 형태를 취할 수는 있되, 탐욕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한 종결될 수는 없다. 탐욕의 정신으로 만연된 세계 속에서 이른바 사회주의적인 계급 없는 사회를 바라는 것은 한낱 환상이며 위험한 환상이다. 존재적 실존양식에서는 한 사람 이상이 아니 수백만의 사람이라도 하나의 대상을 놓고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혼자 즐기겠다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Joy와 Pleasure의 차이
‘기쁨’joy과 ‘쾌락[짜릿함]’pleasure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일상적인 언어관용을 따르자면, 쾌락이란 굳이 능동성[생동성]을 요하지 않는 욕망의 충족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듯하다. 현대 사회에 만연된 쾌락산업과 끊임없는 새로운 자극의 충족은 각기 다른 정도의 말초적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기쁨으로 충만 시키지는 못한다. 오히려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에 수반되는 현상인 기쁨이 부재(不在)한 삶이 사람들로 하여금 새롭고 좀 더 자극적인 쾌락을 끊임없이 추구하도록 몰아 간다. 쾌락과 말초적 흥분은 절정을 넘어서면 비애(悲哀)의 감정을 남긴다. 흥분은 맛보았지만, 그릇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적인 쾌락은 육체만 탐하면 되지만, 성적인 기쁨은 육체적 친밀도가 사랑의 친밀도와 일치할 때에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존재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종교 및 철학 체계 에서는 ‘기쁨’이 중심 역할을 한다. 불교는 ‘쾌락’을 배척하지만, 석가모니의 죽음에 관한 보고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궁극의 단계, 즉 열반은 기쁨의 상태로 묘사되어 있다. 시편 15편의 송가는 기쁨에 관한 더 할 수 없는 찬가이다. 안식일은 기쁨의 날이며, 메시아의 시대에는 온 누리가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라고 예언서들은 전한다. 기독교에서는 ‘복음[기쁜 소식]’이라는 명칭부터가 즐거움과 기쁨이 지닌 중심적 의미를 시사한다. 기쁨은 소유를 포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이요, 슬픔은 재물에 매달리는 자가 져야 할 몫이다.(마태복음 13:44/19:22) 제자들에게 한 예수의 최후 발언에는 궁극적 의미에서의 기쁨이 표현되어 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한복음 15:11) 에크하르트 수사의 사상에서도 기쁨은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웃고 아들이 웃음으로 응답할 때, 그 웃음은 즐거움을 불러일으키고, 그 즐거움은 기쁨을 만들며, 그 기쁨은 사랑을 낳고, 그 사랑은 인격을 만들어내며, 이 인격이 성령을 창조한다.” “기쁨은 선이며, 슬픔이나 비애 혹은 우울은 악이다. 요컨대 기쁨은 자기실현이라는 목표를 향해가는 도상(途上)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체험”이라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죄의 의미
기독교에서 의미하는 ‘죄’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은 ‘신의 뜻에 대한 불복종’과 일치한다. 국가와 교회는 각기 나름의 계급조직을 지키기 위해서 협력했다. 국가는 불복종을 죄로 공표하는 이데올로기를 얻기 위해서 종교가 필요했고, 종교는 국가에 의해서 복종의 미덕으로 훈련된 신자들을 필요로 했다. 사람들이 법을 존중하는 이유는 비단 처벌이 두려워서일 뿐만 아니라, 불복종 자체가 그의 내면에 도덕적 및 종교적 의미에서의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 25절은 에덴동산에서 남자와 여자는 둘 다 알몸이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서로 알몸으로 마주하고 있었지만 서로 부끄러워 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럴 수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타인으로서, 서로 분리된 개체로서가 아니라 한 몸으로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그들의 타락 이후 근본적으로 변한다. 그들은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이 된다. 다시 말하면 이성을 갖추게 되고, 선과 악을 인식하게 되며, 그들 자신이 서로 분리된 존재임을, 원래의 한 몸이 쪼개져 각자 낯선 존재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육체적으로는 서로를 갈망했을는지 모르지만, 서로 사랑하지는 않았다. 육체적 결합이 인간의 소외감을 치유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점은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이브는 자기 잘못을 시인 하는 대신 뱀에게 핑계를 전가(轉嫁)했고, 아담은 이브에게 모든 잘못을 전가했다. 어떤 죄가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었을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신의 말에 대한 불복종일까 아니면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려하지 않았다는 점일까? 구원이란 상실한 일체감을, 인간과 신의 초자연적인 합일을, 아울러 사람과 사람 사이의 합일을 재수립하는 작업이다.
죽음에 대한 극복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석가모니와 예수와 에크하르트 수사가 가르쳐준 길로서 삶에 집착하지 않는 것, 삶을 소유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더는 살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죽음에 선행하는 고통이나 괴로움을 두려워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것이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부조리 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삶이 소유물로 체험되는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이 경우에 사람 들은 죽음 자체를 두려워한다기보다,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잃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한다. 모든 형태의 소유물에 대한 욕구, 특히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수록 그만큼 죽음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도 줄어든다. 우리는 잃을 것을 그만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존양식에서는 시간이 우리의 지배자이다
존재적 실존양식은 오로지 ‘지금, 여기’에만 있다. 반면 소유적 실존양식의 인간은 그가 과거에 축적한 것에 묶여 있다. 그는 과거를 돌아보며, 과거의 느낌들을 추억함으로써 과거를 지속적으로 느끼려고 애쓴다. 그는 바로 과거 자체이다. 사랑의 체험, 기쁨의 체험, 어떤 진리를 발견하는 체험은 시간 안에서 벌어 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다. 이와 같은 ‘지금, 여기’는 영원(永遠)에 다름 아니다. 초시간 적이다. 영원이란 우리가 흔히 잘못 생각하듯이, 무한으로 연장된 시간이 아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개념은 우리의 육체적 실존으로 인한 불가피한 요소이다.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는 유한한 존재 이므로, 시간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을 존중하는 것과 시간에 굴복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소유적 실존양식에서는 시간이 우리의 지배자이다. 산업사회에서는 만사가 시간의 지엄한 명령에 굴 복한다. 대부분의 우리 활동은 전적으로 시계에 맞춰 조정되어 있다. 시간은 그냥 시간이 아니라 바로 돈 이다. 기계는 최대한으로 활용되어야 하며, 노동자들에게는 따라서 기계에 맞춘 리듬이 강요된다. 기계로 인해서 시간은 인간의 지배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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