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2 - [철학] - 에리히 프롬 Erich Fromm의 소유냐 존재냐 공부하기 8편
새로운 사회의 특성
냉철한 객관성을 지녔는지 아닌지가 ‘꿈꾸는 유토피안[몽상가]’과 ‘깨어 있는 유토피안[이상주의자]’을 구별하게 하는 것이다. 자연과학의 지배로부터 새로운 사회과학의 지배로 전환하는 변혁이 성공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는 최고의 유능한 인재들이 얼마나 현재의 위기를 의식하고 새로운 휴머니즘적 인간관계에 자신의 힘을 쏟느냐에 달려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들의 집중적 분투(奮鬪)만이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들을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유로워지려면, 다시 말하면 병적 과소비로 산업을 추진시키는 악순환에서 빠져나오려면, 경제체제의 근본적 변혁이 있어야 한다. 병든 인간을 제물로 하고서 그 건강을 부지(扶持)하는 오늘날의 경제적 상황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우리의 과제는 건전한 인간을 위한 건전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건전한 인간을 위한 건전한 사회 만들기
이 목표를 향해서 가는 데에 중요한 첫걸음은 ‘건전하고 이성적인 소비’를 지향하는 생산의 수행이다. 여기에서 과연 어떤 욕구가 건전하며 어떤 욕구가 병적인지를 누가 결정하느냐는 극히 어려운 의문이 제기 된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분별 있는 소비에 이르는 길은 오로지, 되도록 더 많은 사람이 소비 태도와 생활 스타일을 바꾸려고 뜻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런 뜻을 품게 하려면, 그들에게 지금껏 습관화된 것보다 한층 더 매력적인 소비유형을 제공해야만 한다. 이것은 점진적인 교육과정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은 지대한 것이다. 국가의 소임은 병적 소비에 맞서서 건전한 소비규범을 확립하는 일이다. 그런 규범의 확립은 원칙적으로 가능하다. 미국의 식품의약청(FDA)이 그 좋은 예이다. ‘무엇이 인간의 복지에 유용한가?’라는 원칙에 따라서 선택적 소비와 선택적 생산을 권장하자는 생각에는 끊임없이 반론이 제기되어왔다. 반론의 요지는 자유시장 경제하에서는 소비자가 어차피 자기가 원하는 것을 구매하기 때문에 선택적 생산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반론이 도외시한 요점은 ‘소비자의 욕망은 생산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측면이다. 광고는 소비 욕구를 증대 시킨다. 고객이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특권이 있다면, 서로 경쟁하는 여러 상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특권 아닌 특권뿐이다.
국민 지지를 통한 건전하고 분별 있는 소비
건전하고 분별 있는 소비는 전적으로 기업의 이익과 성장의 관점에서 생산을 결정하는 기업 경영인과 주주의 권리를 과감하게 제한해야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런 변혁은 헌법을 바꾸지 않더라도 법률 제정만으로도 성취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이미 공공복지를 위해서 사유재산을 제한하는 많은 법규가 있다. 우선 광고의 암시적 영향력만 제거된다면, 장기적으로는 소비자의 욕구가 생산 방향을 결정하게 될 것이며, 현존하는 기업들은 이 새로운 욕구에 맞춰서 생산시설을 바꿔야 할 것이다. 이 모든 변화는 한 단계씩 국민 다수의 동의를 얻어야만 수행될 수 있다. 그 최종 결과는 전혀 새로운 경제체제가 될 것이다. 대기업들은 당연히 그들의 막강한 힘을 동원해 이와 같은 새로운 변혁의 싹을 애초부터 잘라버리려고 할 것이 다. 대기업의 이런 저항을 분쇄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건전하고 분별 있는 소비형태를 지향하는 압도적인 국민의 열망뿐이다. 시민들이 소비자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효율적 방법의 하나는 전투적 소비자연맹을 조직해 불매동맹을 무기로 사용하는 일이다. 소비자 스트라이크[파업]는 정치적 진영이나 정치적 구호를 뛰어넘는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분별 있고 인간다운 소비에의 욕구라는 단 하나의 동기가 그들 모두를 하나로 묶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운동이야말로 어쩌면 참 민주주의의 발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개개인이 사회적 사건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며, 소외되지 않은 능동적 방식으로 사회발전에 결 정권을 행사하려고 노력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참여 민주주의의 본질
존재 지향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경제적 및 정치적 기능을 적극적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산업적 및 정치적 참여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한에서만, 우리는 소유적 실존양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참여 민주주의의 본질은 모든 개인이 공동체의 관심사를 자기 개인의 관심사와 똑같이 중시하는 데에, 다시 말하면 모든 시민이 공공복리를 근본적으로 자기의 일로 여기는 데에 있다. 참여 민주주의의 실현방안의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로서 (약 500명의 구성원을 갖는) 수십만 개의 이웃 집단들을 상설기구로 구성하여 그 집단들이 경제, 외교정책, 보건 및 교육, 복지정책 등 각 분야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토의하고 결정하도록 하자는 제안이다. 그럴 때 이 집단들 의 총체가 ‘하원(下院)’을 이룰 것이며, 그 결정이 다른 정치적 기구의 결정과 통합해서 입법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확신에 이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건, 즉 적절한 정보의 확보와 자신의 결정이 영향력을 가진다는 의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능동적이고 책임감 있는 참여는 관료주의적 경영이 휴머니즘적 경영으로 대체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관료주의란 인간을 사물처럼 관리하는 방법이며, 값싸고 쉽게 통제하고 수치화하기 위해서 사물을 질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양적 관점에서 취급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관료주의적 절차는 통계적 자료에 의해서 수행된다. 관료주의자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개인적인 책임이 두려워서 규칙의 뒤로 도피처를 찾는다. 그에게 확신과 자긍심을 부여하는 것은 규칙에 대한 충성심이지, 인간성의 명령에 대한 충성심이 아니다.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1906~1962)은 관료주의자의 극단적인 표본이었다. 그가 수십 만 명의 유대인을 죽음의 가스실로 보냈던 동기는 유대인에 대한 개인적인 증오심이 아니었다. 그는 그 누구도 증오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의무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규칙에 복종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규칙을 어겼을 때만 죄책감을 느꼈다. 그의 법정 진술에 의하면, 그는 단 두 차례 죄의식을 느꼈는데, 그것은 어린 시절 학교에 무단결석을 했을 때와 공습 경보시에 방공호로 대피하라는 명령을 어겼을 때였다. 관료주의자의 가장 주된 특성은 ‘인간적 공감과 연민의 결핍’과 ‘규칙이라는 우상에 대한 맹목적 숭배’이다. 이런 관료주의적 태도는 의사, 간호사, 교사와 교수들, 아내를 대하는 남편들, 자식을 대하는 부모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양심과 의무 사이의 갈등조차 일으키는 적이 없다. 그들의 양심이란 곧 의무이행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공감과 동정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은 그 들에게는 없다.
존재적 실존양식에 바탕을 둔 사회의 건설에는 이밖에도 많은 조치가 필요하다. 상업광고와 정치선전에서 모든 세뇌적 방법이 금지되어야 한다. 순전히 암시적인 방법을 동원한 광고폭격, 특히 TV의 광고 방송은 모든 국민을 바보로 만든다.
부강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격차가 메워져야 한다. 원조는 강대국의 편에서 자국의 이익이나 정치적 이득을 떠나서 제공되어야 한다. 지구상에 현존하는 이웃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후손에게도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해악은 연간수입의 최소치를 보장해줌으로써 제거될 수 있다. 이 제안은 모든 인간은 일하든 하지 않든 간에 먹는 것과 거처할 곳에 대해서만은 무조건적인 권리를 가진다는 신념에 근 거한다. (즉 인간은 사회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든 안 하든 간에 생존에 대한 무제한적인 권리를 가 진다는 규범이다) 우리는 이런 권리를 애완동물에게는 인정하면서도, 우리의 이웃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법이 발효된다면 개인의 자유는 무한히 확장될 것이다. 그 누구도 경제적으로 (부모 와 남편과 사장 같은) 타인에게 의존해서 굶주림에 대한 불안으로 강박을 느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전혀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인재들은 얼마간 가난한 생활을 감수할 각오만 하면 뜻하는 방식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은 가부장적 지배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이것은 사회의 휴머니즘화를 위한 기본전제이다. 약자에 대한 힘의 행사는 현존하는 가부장제의 핵심이며, 미개 국가에 대한 산업국가의 지배,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기성세대 지배의 핵심이기도 하다. 정부, 정치인, 시민들에게 모든 실제적인 문제에서 지식을 조달하고 조언을 주는 과제를 수행할 최고 문화협의회가 구성되어야 한다. 이 협의회는 그 나라의 지적 및 예술적 엘리트로서, 우수성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남녀 대표자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정신적, 문화적 삶에서 누가 탁월한 대표자인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치된 의견이 있으므로, 최고 문화협 의회의 적격 구성원을 찾아내는 일은 가능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협의회의 구성원에는 지배적인 견 해에 대한 반대 관점에 있는 사람들도 포함되는 것이 극히 중요하다. 어려운 점은 위원회 구성원을 찾아 내는 일이 아니라 선별하는 절차이다. 이 문화협의회는 각종 특수 분야의 문제들에 관해서 연구를 의뢰할 수 있도록 충분한 자금을 지원받아야 한다. 객관적인 정보를 전파할 수 있는 효율적인 체계가 확립되 어야 한다. 이른바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 정보를 은폐하거나 변조하는 행태는 폐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설 령 이런 종류의 부당한 정보 은폐 행위가 자행되지 않더라도, 오늘날 보통 시민들은 필수적인 참된 정보 를 거의 입수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각종 기관에서 흘렸거나 보도기관이 퍼뜨린 진 실이 아닌 정보를 입수하고 있기 일쑤이다. 신문, 잡지, TV, 라디오는 사건을 재료로 하여 상품, 즉 뉴스를 생산한다. 뉴스의 판매도 일종의 장사인 한, 신문이나 잡지 편에서 잘 팔리는 상품을 선호하고, 아 울러 광고주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기사를 싣는 것을 우리로서는 막을 길이 없다.
탐욕과 시기심은 어차피 인간 본성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주장은 엄밀히 살펴보면 상당 부분 설득력을 잃 는다. 탐욕과 시기심이 강하게 노출되는 현상은 천성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늑대들 틈에서 늑대가 되어 야 한다는 보편화된 압력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단 사회적 풍조가 바뀌면, 즉 보편적으로 통용되 던 가치관이 바뀌면, 이기심으로부터 이타심으로의 이행도 한결 쉬워지리라고 믿는다. 어쨌든 존재적 실존양식은 (비록 억압되어 있을망정) 항상 현존하고 있다. 개종하기 전에 바울로서의 요소를 이미 갖추고 있지 않았다면, 사울이 바울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새로운 인간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이나 기존의 인간과 동떨어진 인간이 아니다. 문제는 다만 방향전환인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