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Essays in love(1993) 알랭 드 보통

지적허영 2023.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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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작가 알랭 드 보통 Alain de Botton(1969~현재)의 가장 큰 장점은 날카로운 관찰력과 분석력 그리고 일상 언어의 절묘한 사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 ‘나’와 ‘클로이’가 우연히 비행기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 장면을 우스우면서도 집요하게 필연으로 승화시키며 시작한다. 사랑에 빠진다는 느낌, 과정, 그 속에서 별것도 아닌 것들로 인해 남녀의 차이만큼 서로 다른 시각을 내세우며 싸우고, 이별 후 자살 시도까지 하지만 또 다른 ‘너’를 만나 또 다시 사랑은 시작된다.

 

남자의 시각에서 ‘느낌의 사랑’을 ‘분석의 사랑’으로 표현한 작품이며, 사랑하는 중에 느끼고는 있었지만, 딱히 꼬집어 꺼내지 못했던 감정들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문장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우리는 사건들에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서사적 논리를 부여했다. (…) 나의 실수는 ‘사랑하게 될 운명’을 ‘어떤 주어진 사람을 사랑할 운명’과 혼동한 것이다.” (1장. 낭만적 운명)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람을 꿰뚫어 보는 일을 중단하고자 하는 순간적인 의지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 모든 갑작스러운 사랑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장점을 의도적으로 과장하는 면이 있는 것이 아닐까? (…)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사랑에 있어서) 최초의 꿈틀거림은 필연적으로 무지(無知)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 이렇게 왜곡된 사랑의 현실에서는 아는 것이 늘어날 경우, 그것은 장애가 될 수도 있다. (…) 가장 사랑하기 쉬운 사람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2장. 이상화(理想化))

 

“스스로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고 확신하지 않는 경우에 타인의 애정을 받으면,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훈장을 받는 느낌이 든다. (…) 미국의 코미디언 그루초 마르크스 Grucho Marx(1890~1977)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회원으로 받아들여 줄 클럽에는 가입할 생각이 없다는 농담을 즐겨 했다. 이 (역설적인) 농담은 사랑에도 적용되는 진리이다. (…) 사랑하는 사람이 마르크스주의자를 우습게 생각할 때만 마르크스주의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해서 최대로 존중하게 된다. (…) 만일 우리 내부에 부족한 데가 전혀 없 다면, 우리는 사랑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에게서 비슷하게 부족한 데를 발견하면, 오히려 불쾌 감을 느낀다. 답을 찾기를 기대했지만, 우리 자신의 문제의 복사본만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 프랑스 작가 스탕달 Stendhal(1783~1842)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기초로 해서만 생길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 (6장. 마르크스주의)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 클로이의 모든 행동 자체에 사랑할 만한 면들이 내재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내가 그녀의 표정이나 몸짓 또는 목소리와 어휘 사용에 부여하기로 결정한 (의미, 즉) 어떤 것일 뿐이다. 그래서 신중한 사람은 내가 사랑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지 않고, 내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느냐고 묻는다. (…) 내가 사랑하는 것이 정말로 ‘저 여자’일까? 그녀의 얼굴이나 몸매에 잘못된 환유(換喩)를 적용해 실체의 속성 한 가지를 실체 자체로 대체해버린 것은 아닐까? (…) 목마른 사람이 물이나 야자나무나 그늘을 본다. 그런 것들이 정말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자신에게 그런 믿음에 대한 욕구[욕망]가 있기 때문이다. 갈증은 물의 환각을 낳고, 사랑에 대한 욕구는 왕자나 공주라는 환각을 만들어낸다.” (11장.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는가?) 

 

함께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몰라도, 함께 싫어하는 것을 욕하는 친밀함에 비할 수 는 없었다. (…) 사랑은 (사랑하는 커플 이외의) 외부자들을 지속적으로 비판하면서 커나간다. 우리가 다른 모든 사람에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충성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서로에게 충성한다는 가장 훌륭한 증거였다.” (13장. 친밀성)

‘소속감’과 ‘우리만의 비밀’이 친밀함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김춘수의 시 ‘꽃’처럼)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 많은 종교에서 우리를 볼 수(알 수) 있는 신이라는 개념이 중심을 차지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누가 나를 본다는 것은 내가 존재한다고 인정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오직 인간만이 자신을 규정하고 자의식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혼자서는 절대로 성격이 형성되지 않는다.’ 스탕달의 말이다. 성격의 기원은 우리의 말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있다는 의미이다.” (14장. ‘나’의 확인)

 

“우리가 우리의 짝과 얼마나 행복하든, 그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사랑의 요구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늘 갈망의 요구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나는 클로이를 사랑할지 모르지만, 그녀를 알기 때문에 그녀를 갈망하지는 않는다. 그녀의 모든 성향은 이미 (내 머릿 속에) 도표로 정리되어 있고, 따라서 갈망에 필요한 ‘신비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 철학자들이 전통적으로 이성에 따른 삶을 옹호하고 이성의 이름으로 욕망에 의한 삶을 비난해왔다면, 그것은 이성이 ‘지속성 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15장. 마음의 동요)

 

감정은 호르몬의 작용이라서 유통기한이 있다. 물론 그래서 감정이 잘못되었다거나 나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저 그렇다는 사실을 직시(直視)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결혼하고픈 마음은 사랑하는 ‘감정’으로, 대신 결혼 결정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내 지속적으로 그 사랑을 지키고 유지하겠다는 ‘이성’으로 하는 게 가장 적절하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싫어한다.’ 이것은 나는 이런 식으로 너를 사랑하는 위험을 무릅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싫다는 근본적인 주장과 통한다. 어떤 사람에게 의존하는 기쁨은, 그런 의존에 수반되는 몸이 마비될 듯한 (자신을 향한 나약함과 상황에 대한) 두려움에 비교하면 빛이 바랜다. (…) 클로이가 행복을 받아들이는 어려움은 거기에 이르는 인과 과정이 없다는 것, 따라서 내 삶에서 그 행복을 빚어낸 요소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에서 온다.” (16장. 행복에 대한 두려움)

통제 욕구는 인간의 본성이고, 사랑의 시작은 기적 또는 신이나 하늘이 맺어준 그러니까 개인의 그 어떤 노력도 없었던 것이기에, 사랑에 수반되는 행복은 동시에 위험하고 불안한 것이 된다. 같은 논리로 사랑이 끝날 때도, 개인은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하게 되었냐고 묻지 않는 것이 예의이다. 어떤 (특정한) 측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속성이나 특질을 넘어선 존재론적 지위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이다. 설사 우리가 아름답고 부유하다고 해도, 이런 것들 때문에 사랑받고 싶어 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서 그것이 사라지면 사랑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이 내 얼굴보다는 머리를 칭찬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꼭 얼굴을 칭찬해야겠다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정적이고 피부조직에 기초를 둔) 코나 입술보다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운동신경과 근육에 기초를 둔) 미소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주기 바란다. 내 소망은 내가 모든 것을 잃고 ‘나’만 남았다고 해도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다. (…) 상대가 자신의 목에 입을 맞추는 방식, 책장을 넘기는 방식, 농담하는 방식에 유혹당했던 여자는, 바로 이 점들 때문에 짜증을 낸다. 마치 사랑의 끝은 그 시작 안에 이미 포함된 것 같다.” (17장. 수축)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만큼이나 대책 없는 질문이다. 두 경우 모두 사랑은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들 때문에, 받을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선물로서 주어졌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 불쾌한 일이 있으면 그 즉시 화를 표현하는 것이 가장 너그러운 일이다. 그렇게 하면 상대는 죄책감을 키울 필요도 없고, 삐친 사람을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 낭만적 테러리스트는 말한다. ‘너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 너한테 질투심을 일으켜서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역설이 생긴다. 만일 상대가 사랑으로 보답한다면 그 즉시 그 사랑이 더럽혀진 것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강요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 사랑은 자발적으로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할 테니까 말이다.” (18. 낭만적 테러리즘)

 

“나는 자살의 비일관성을 깨달았다. (…) 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온 세상 사람에게, 특히 클로이에게 보여줄 수 있으려면 죽어야 했다. 그러나 나의 죽음이 클로이에게 준 충격을 보고 화를 풀려면 나는 살아 있어야 했다.” (21장. 자살)

 

“고뇌에 괜찮은 면이 있다면, 그것은 이런 비참한 상황을 나 자신이 (아무리 부당한 증거라고 하더라도) 특별하다는 증거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달리 왜 내가 이런 엄청난 괴로움을 겪도록 선택되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내가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증거, 따라서 어쩌면 그들보다 낫다는 증거가 된다. (…) 자기 증오에서 생겨난 마르크스주의 때문에 나는 나를 받아들이려는 어떤 클럽의 회원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 콤플렉스 역시 나를 클럽 문간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지만 그 것은 엄청난 자기 사랑의 결과이며, 내가 클럽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내가 너무 특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대부분 클럽은 천박하기 때문에. (…) 나는 고통을 겪는다, 고로 나는 특별하다. 나는 이해받지 못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 크게 이해받을 만한 자격을 갖춘 것이 틀림없다.” (22장. 예수 콤플렉스) 고통과 핍박에 대한 이런 자기 합리화의 부정적인 면은, 특히 사이비 종교가 근절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 가 된다.

 

“지혜는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자체’라고 가르친다. (…) 문제를 파악하는 것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 즉 ‘지혜’와 ‘지혜로운 인생’은 크게 다르다. (…) 우리가 바보 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우리가 현자(賢者)가 되지는 않는다.” (24장. 사랑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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