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우리는 사랑일까? The Romantic Movement(1994) 알랭 드 보통

지적허영 2023.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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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중반의 평범한 직장인 ‘앨리스’는 친구의 결혼식에서 만난 훈남 ‘에릭’과 사귀지만, 사랑하는 만큼 아픔이 커질 때쯤 다른 남자 ‘필립’을 만난다. 그러면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는 반대로 여자의 시각에서 사랑을 곱씹어 본다. 누군가를 진정 사랑한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그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스스로의 감정을 사랑했음을 깨닫는 순간은 우리 각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예술이란 삶을 모방하고자 분투하지만 결국 실패할 뿐 이라고 믿었다(이데아에 대한 모방의 모방). (…) 그러나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이 생활을 모방하는 게 아니고 생활이 예술을 모방한다고 말했다. 3차원적인 애인에게 받는 키스는 (2차원적인) 영화에서 보는 키스보다 판에 박은 듯 형편없다는 것이다. (…)

 

액자는 ‘여기에서 특별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라는 의미였다.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캔’ 작품. 위키피디아 제공

영국 문학비평가 시릴 코널리(1903~1974)가 ‘저널리즘은 한 번만 고민하는 것이고 문학은 다시 보는 것’으로 정의한 데 따르면, 통조림은 저널리즘적[액체를 담은 한번 쓰고 버릴 용기]이었다가 미국 예술가 앤디 워 홀 Andy Warhol(1928~1987)이 액자에 넣음으로써 (벽에 진열하고 반복해서 관람하는) 문학의 반열로 격상된 셈이었다. (…) 애인이 “당신처럼 사랑스러운 손목⋅사마귀⋅속눈썹⋅발톱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거 알아?”라고 속삭이는 것과 예술가가 수프 통조림이나 세제 상자의 미적인 성질을 드러내는 것은 구조적으로 같은 과정이 아닐까?” (예술이냐 생활이냐)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11장. 그녀에 게서 무엇을 보는가?’ 내용과 연결된다.

 

“‘다른 사람들’이 ‘바로 거기’라고 정한 곳에 가고 싶다는 것, 그것은 (자신도) 중심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갈망이었다. (…) 그녀가 에릭에게 끌린 데는, 그 남자가 다른 여자들이 보기에도 매력적이라는 점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가치를 알아주고 탐낸다는 점이 그녀의 욕망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 다른 사람들이 갈망하는 남자가 바로 그녀를 원했다는 사실이 그녀의 허약한 자존감을 붙들어주었다.” (촉매)

 

“미국 추상 예술가 제니 홀처('텍스트'를 주작업 재료로 사용하는 개념주의 예술가)(1950~현재)가 작품으로 구현한 경구(警句)가 있다. ‘누군가의 인품을 빨리 알고 싶다면, 우유를 한 모금 입에 가득 머금었다가 그에게 뿜어보라.’” (상대방을 안다는 것) 갑작스러우면서도 불쾌한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과 본심이 나오기 때문이다.

“‘에릭이 진짜 성미 고약한 자식이라면, 자기 입으로 자기가 성질을 잘 부린다는 걸 안다고 말하겠어?’ 그녀는, 자기 결점을 아는 것은 그 결점이 없는 것과 같다고 믿는 오류를 범했다.” (예측 가능성)

‘모르기 때문에 악을 저지른다.’라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권력 남용 사례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의료의 범위를 참혹한 응급 환자에만 국한해서 정작 널리 퍼져 있지만 덜 극적인 다양한 질환을 연구하지 않는 것과 같다. (…) 권력이란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영향을 미쳐서, 사람이나 사물에 작용을 가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사랑에서는 권력이 훨씬 수동적이고 부정적인 정의(定義)에 의존하는 것 같다. 다른 영역에서와는 달리,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아무 의도도 없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이다.” (권력과 007) 

 

“앨리스는 권력을 경험하는 게 싫다고 (그러니까 권위주의적인 남자는 싫다고) 주장하면서도 존경할 수 있는 남자를 원했다. 또 그녀가 공언해온 모든 신념에 어긋나긴 해도, 그녀가 가장 존경할 수 있는 남자는 그녀에게 존경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 에릭은 침묵을 통해 신성한 거리감을 얻었다. 침묵은 상대의 불안을 반사(反射)한다. 침묵과 마주하면,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죄가 발각되었다고 느끼고, 아둔한 사람은 멍청한 걸 들켰다고 생각한다. 신체적으로 위축된 사람은 못생겨서 그러리라고 여긴다. 또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흔히 명확함과 의사소통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쉽게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나 일에는 묘한 매력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학문 분야에서는, 명쾌한 설명에 편견을 갖고 난해한 글을 존중하는 오랜 경향이 있다. 사람을 괴롭히는 글은, 명료하게 술술 읽히는 글보다 왠지 그럴듯하고 더 심오하고 더 참되게 받아들여진다. ‘이 글은 정말 심오 하구나. 내가 이해 못 하는 걸 보면 나보다 똑똑한 걸 거야. 이해하기 어렵다면, 틀림없이 이해할 만한 가치가 더 클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진실은 얻기 어려운 보물이며, 쉽게 읽고 배울 수 있는 것은 경박하고 중요하지 않다는 편견을 반영한다. 인간관계에서도 이런 현상이 있다. 마음이 열려 있고, 명쾌하고, 예측할 수 있고 시간을 잘 지키는 애인보다는 힘들게 하는 애인(나쁜 남자)이 더 가치가 있어 보인다.” (신성한 관계)

 

“앨리스는 에릭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었지만, 역설적으로 에릭이 자신의 곁에 있는 궁극적인 이유가 육체적인 매력이 아니기를 바랐다. 내숭이란 모순으로 정의될 수 있다. 성공한 예술가는 자본주의 제도를 비난하면서도, 작품을 팔아 돈을 벌면 좋아하는 내숭을 보인다. 수백만 달러급 모델은 ‘예뻐야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에요.’라고 내숭을 피운다. (…) 앨리스는 유혹적인 속옷에 돈을 쓰면서도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싶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나한테 그렇게 해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내숭을 보였다.” (왜 사랑 받는가?) “아무리 여자를 칭찬해도, 기본적으로 에릭은 자신이 (어떤 여자보다도 더)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성이 열등하다는 근본적인 믿음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에릭은 여성들에게 관대할 수 있었다.” (여성 혐오) 

 

“여행은 지리적이라기보다 심리적인 활동으로 읽을 수 있다. 그 동기란 여행을 예약하는 자신이 이런 활동을 즐기는,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다. ‘나’가 여행을 가는 게 아니라, 여행이 ‘나’ 를 바꿔 주리라는 생각이다. 앨리스는 풍경이 변해도 그것을 보는 눈은 바뀌지 않으리라는 점을 잊고 있었다. (…) 앨리스는 고전적인 소비의 덫에 걸린 것이었다.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는 행위에 무의식적으로 깔린 목적은, 단순히 그것을 가지는 게 아니라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스스로 변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모델이 입은 옷이 아니라 모델 자체였다.” (자기 자신에 대한 휴가)

 

앨리스는 자신이 단일한 사람이 아님을 상기했다. 옆에 있는 사람에 따라서 그녀가 다른 사람이 된다는 뜻이었다. (…) 일곱 살 아이에게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말도 안 되는 허섭스레기이며, 만약 그의 작품이 일곱 살 아이들에게만 읽힌다면 셰익스피어는 그 아이들이 이해하는 수준에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게 하나?)

 

“보는 것은 항상 다른 요소에 의해 보강된다. 심지어 이미 알고 있거나 바라는 것에 따라 보는 것이 달라 지기도 한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을 곧이곧대로 보지 않고, 이미 인식하고 있는 영상으로 눈을 가리고 힐끗 쳐다볼 뿐이다. 앨리스의 출근길만 봐도 그렇다. (…) 그녀는 순수한 눈으로 사방에 펼쳐지는 것을 보기보다는 익숙한 대로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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