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칸트] 도덕의 정체, 그 베일을 벗기다 (정언명령 이해하기)

지적허영 2023.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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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은 참 어려운 주제이다. 왜냐하면 어떤 하나의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도 누군가는 전혀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을 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굉장히 도덕적으로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여전히 도덕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그다지 충분한 이해 이르지 못한 것 같다그렇기 때문에 철학자들도 여전히 다양한 이론들을 제시하고 있다.  오늘의 주제인 칸트의 도덕철학은 그 중에서도 우리 삶에 어떤 한 줄기 빛을 던져주기에 여전히 아주 큰 영향력을

미치고 또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 도덕철학의 정말 특이한 점은 결과를 기준으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도덕적인 옳고 그름을 따질 때 당연히 결과를 아주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을 하곤한다.  예를들면 학교 폭력이 나쁘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동의를 하지만 그게 왜 나쁜지 이유를 물어보면 우리가 가장 흔히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니 나쁘다" 라고 답변할 것이다. 그런데 한번 이 사고 방식을 잘 들여다 보면 거기에는 결과를 바탕으로도덕적인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리가 들어있다.

즉 학교 폭력이 나쁜 이유는 피해자가 고통을 받는다는 안좋은 결과를 초래하니 나쁘다는 주장으로 이 주장은 아주 자연스럽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논리 같이 들린다. 그러나 이렇게 도덕적인 판단에서 결과가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할 수 있지만그렇다고 해서 결과를 바탕으로만 도덕을 설명 한다면 뭔가 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학교 폭력이 나쁜 이유가 꼭 나쁜 결과를 초래해서가 아닌  "폭력이라는 것 자체가 나쁘니까 학교 폭력이 나쁜다" 라고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만약에 당신이 이런 생각을 하였다면 칸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도 볼 수가 있다

 

칸트는 기본적으로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행위의 의도가 도덕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다. 예를 들면 내가

축구를 하다가 어떤 아주 미워하는 친구가 있어서 일부러 그 쪽으로 티가 안나게 공을 찼다고 가정해보자. 그 친구를 공으로 맞추려는 의도를 가진 경우 결과를 기준으로만 도덕적인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한다면 만약에 그 친구가 공에 맞았다면  당연히 나의 행동은 나쁜(그름)게 되겠지만, 만약에 그 친구가 공에 맞지 않았다면 나의 행위에는 아무런 도덕적 판단이

내려지는 이유가 없게 된다. 그러나 칸트가 그 친구를 맞추려고 공을 찬 나의 행위는 그 친구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악한

의도를 갖고 행해진 것이기 때문에 결과와 상관없이 악하다는 판단한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과연 어떤 의도가 선한 의도이고 어떤 의도가 악한 의도인지 기준을 제시 하는 일이 남게된다. 여기서 칸트는 "도덕법칙에 충실히 따르려는 의도는 선한 것이고 그것은 반하려는 의도는 악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당연한 말 같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설명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도덕법칙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이게 아직 설명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 도덕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는 그 도덕법칙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설명하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더 생기는게 우리가 주변 세상을 한번 잘 보면 도덕 법칙은 개인에 따라서 또는 문화권의 따라서 각기 다른 수 있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어떤 문화권에서는 여성이 어두운 밤에 돌아다니면 안 된다라는 법칙이 있지만 우리 나라에는 그런 도덕 법칙은 전혀 통하지 않게된다. 또는 만약 어떤 사람이    여성을 밤에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려고 문을 잠가 놨다면 어떤 문화권에서는 전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행위일 수도 있지만 어떤 문화권에서는 굉장히 심각한 도덕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보편적인 도덕법칙을 제시 하는 건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이 부분에서 칸트는 굉장히 과감한 주장을 펼친다.

즉 바로 도덕법칙은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 모른 문화권에 걸쳐 보편적으로 적용되도록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실제 세계를 둘러보면 각 시대별로 또는 문화권 별로 각기 다른 도덕법칙들이 존재했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칸트는 그렇게 경우에 따라 변하는 도덕법칙은 진정한 도덕법칙이 아니고 모든 이성적인 존재자들이 따라야만 하는 그런 보편적 도덕법칙만이 진정한 도덕법칙이라고 생각했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도덕법치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당위가 어떤 성격을 가져야 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도덕법칙은 "우리에게 뭔가를 해야한다"라고 명령을 하는데 다른 말로 도덕법칙은 우리에게 당위를 부여한다라고 말할수 있다.

그런데 도덕법칙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당위가 과연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위라는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데 뭔가를 해야한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예를들어 나는 오늘 숙제를 해야 한다라는이 문장에는 숙제를 해야 한다는 당위가 들어가 있다. 그런데 이 당위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이 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숙제를 안 하면 선생님한테 혼나기에 이 숙제를 해야 한다고 해석될 수도 있다. 또는 숙제를 해야 공부를 잘하니숙제를 해야 한다고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두 경우를 잘 살펴보면 이 두 경우 모두 내가 숙제를 해야 하는 이유가, 즉

그 당위의 근거가 우리가 갖고 있는 경험적 정보에 의해서 주어지게 된다는 걸 알 수가 있다.

 

선생님께 혼나기 싫으니까 숙제를 해야 하는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면 내가 숙제를 해야 된다고 강제하는 근거는 선생님께

혼나는 것이 싫다는 나의 성향은 지금까지 여러번 경험을 통해서 선생님께 혼나는 일이 굉장히 불쾌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좀 특이한 취향 이어서 혼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그런 성향을 갖고 있다면 혼나지 말아야 되기 때문에 숙제를 해야 한다는 이런 당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공부를 잘하고 싶고 공부를 잘 하려면 숙제를 해야 한다는 경우를 살펴봐도 여기서 그 당위가 나에게 적용되는 이유는 내가 공부를 잘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만약에 공부에 전혀 미련이 없는 그런 욕망의 구조를 갖고 있다면 공부를 잘하려면 숙제를 해야한다는 이 명령은 나에게 아무런 방해도 만들어 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경우에 우리에게 부가되는 당위들은 경험적인 정보에 의해서 생겨난다. 그렇다 보니 경험적인 정보가 만약에 달라지면 당위 내용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도덕적인 법칙이 우리에게 부가하는 당위는 칸트가 생각하기에는 경험이 달라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오늘 내가 숙제를 해야하는데 그 이유가 선생님과 약속을 했기 때문이라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나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도덕법치의 요구 때문에 당위 적용을 받게된다. 그런데 만약 내가 약속을 어겨도 상관 없다고 가르치는 그런 부모님 밑에서 자라서(한마디로 전혀 다른 경험적인 정보를 갖고 있어서)  약속을 개인적으로 전혀 중요시 하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내가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건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그런 도덕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약속을 지켜야 하니까 그 이유를 위해서 내가 숙제를 해야한다는 이 명령은 경험적인 정보와 상관없이 나에게 어느정도 효력을 갖게 된다. 이게 바로 칸트에게 있어 아주 기본적인 아이디어였다.

 

칸트는 도덕법칙의 당위는 경험적인 정보에 의해서 주어지는 다른 당위들과는 다르게 그 법칙 자체가 구속력을 갖는 그런 당위라고 생각을 했다. 도덕법칙은 단순히 "이렇게 행동하면 어떤 좋은 결과가발생해! 경험적인 정보에 의하면 너는 이걸 따라야 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험적인 조건들과 상관없이 누구나 따라야 하는 법칙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정언명령이다.

 

정언명령이라는 단어는 많이 들어봤지만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영어로 이해를 하면 쉽게 이해가 간다.

Categorical Imperative

Imperative는 명령이라는 뜻이다

Categorical은 칸트철학에서 우리 인간을 이루고 있는 어떤 이미 정해져 있는 체계를 의미한다. 쇼핑 사이트에 들어가면

상품들이 카테고리별로 나눠져 있듯이 우리 인간도 그 안에는 1)시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어떤 구조라던지 아니면

2)공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부분이라든지 또는 3)원인과 결과를 바라보는 그런 부분처럼 인간 의식(생각)의 틀이

카테고리로 나누어져 있다고 칸트는 생각을 했다.

그와같은 이미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카테고리들은 변화 할 수 있는게 아니라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예를들어 공간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인간은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 생각 할 수 없다. 카테고리는 어렵게 말하자면 경험 이전에 어떤 선언적인 것을 뜻하고 좀 쉽게 말하자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Categorical Imperative 즉 정언명령도 우리의 필요나 목적에 따라서 변할 수 있는 그런 명령이 아니라 정해져있는 절대적인 도덕적 명령이라는 의미이다. 이전 예시에서 들었던 혼나기 싫어서 숙제를 해야한다는 이런 명령은 정언명령이 아니다. 왜냐하면 혼나는 것을 피하려는 그 목적이 조건으로 붙고 "그 조건을 위해서라면 이 명령을 따라라" 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에 혼나는 걸 피하려는 목적이 사라지면 숙제를 해야 한다는 그 명령도 효력을 잃어 버리게된다. 반면에 약속을 지켜야 한다라는 명령의 경우에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 지켜야 하는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그게 도덕 법칙이라는 이유 자체만으로 지켜야 하는 명령인 것이다.

 

물론 예를들어 해코지를 당하지 않으려면 약속을 지켜야 한다라든지 아니면 명성을 지키려면 약속을 지켜야 한다라든지 여러 다른 부수적인 조건을 내세워서 약속을 지켜야 한다라고 명령에 근거를 만들어 낼 수 있겠지만 칸트에게 있어

명령은 그런 모든 부수적인 조건들로부터 자유롭고 오로지 그 자체만으로 지켜야 하는 그런 절대적인 법칙이

그리고 칸트는 이 명령 만이 진정한 도덕법칙이고 따라서 이 정명령을 지키려는 의지이 그 자체로 선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예를들어 감옥에 가기 싫어서 사람을 죽이지 않는 건 그 자체로 선한 것이 아니고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선한 거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 잘 생각해 보면 이렇게 우리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명령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황당한 생각이다

예를들어 그 명령(도덕법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진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악한 짓을 많이 저질러도 잘 먹고 잘 사는 경우도 많은 것 같고 이 현실 세계에서는 도덕법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어떤 실질적인 처벌이 가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 도덕법칙을 그 자체만으로 지켜야 하는 것일까?

 

여기서 떠올려야 할 중요한 포인트 한 가지는 칸트는 결과를 바탕으로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에 반대를 했다는 사실이다만약에 도덕법칙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사회 안정을 위해서 라든지 또는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라든지 이유를 들어서  도덕 법칙의 지켜한다라고 주장을 하면 깔끔했고 상식적이고 그럴듯한 것 같은데 칸트는 이렇게 설명을 할 수 없습다.

왜냐하면 칸트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도덕 법칙을 지켜야 하는게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 지켜야 하는게 도법칙다라고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도덕법칙을 그 자체만으로도 지켜야 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여기서 부터는 더 심오한 차원의 철학으로 넘어간다. 사실 생각해보면 절대적인 도덕법칙 이라는 것은 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냥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가도 되지 모른다. 우리가 어떻게 살 건 궁극적으로 정말 뭐가 옳으냐를 결정 해 줄

수있는 기준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보다 조금 더 이전의 시대에는 그런 절대적인 옳고 그름에 대해 결정을 내려 주는 존재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신 이었다. 신이 살인이 나쁘다고 하면 그 판단은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근데 그렇게 되면 도덕이 위기에 처할 수 밖에 없게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절대적인 판단기준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더 이상 없기 때문에...또 다른 방향에서 도덕은 위기에 처하는데  자연과학이 점점 더 발전하면서 점점 더 많은 현상들이 자연적인 인과관계로 설명이 되다 보니 나의 행동도 그런 자연적인 인과관계에 의해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 내가 살인을 저지르고 싶어서 내가 선택해서 살인을 저지르는게 아니라 어떤 법칙 때문에 물리적인 작용에 의해서 내가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만약에 정말로 이렇게 우리에게 행위를 선택할 자유가 없다면 그냥 인과법칙에 의해서 행위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일 뿐 이라면 도덕적인 책임이라는 것도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게된다.

 

이렇게 두가지 측면을 고려해 봤을 때 그 자체로 지켜야 하는 보편적인 도덕 법칙이 있다라는 칸테의 주장을 옹호하기에는더욱더 어려워진다. 그럼 우리는 도덕 법칙의 존재를 포기해야 할까?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선행을 정말로 선한 것으로 만들어 주고 악행을 정말 악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그런 실제적인 기준이 존재한다라고 믿고 싶을 것이다. 예를들어 어떤 정말 가난한 사람이 굶어 죽어가는 이웃을 위해서 자기가 가진 빵 한쪽을 나눠주는 경우를 보면 우리는 그게 선하지 않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반대로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지나가는 아이를 납치해서 고문하고 죽이는 연쇄 살인범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단순히 우리가 경험적인 정보 때문에 악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우리는 과연 이런 직관을 포기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도덕 법칙 같은 것은 근본적으로 허상에 불과하고 선과 악을 나누는 본질적인 기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 할 수 있을까?

아마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몬가 저항감을 느낄 수 있는데  칸트도 마찬가지였다. 칸트는 보편적인 도덕적인 옳고 그름은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을 했다. 만약 보편적인 도덕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 무도한 범죄자를 보고도 악하다고 말할 최종적인 근거가 없게 되고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남을 도와주는는 그런 선한 사람을 보고도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궁극적인 근거를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래도 상관이 없다면 칸트의 생각을 거부 해도 상관이 없지만 만약에 그런 결론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칸트와 같은 길을 가면서 생각을 더해 볼 수가 있다.

 

이성의 영역과 도덕의 영역

만약에 세상을 철저하게 자연과학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본다면 세상은 자연적인 인과관계로 모든게 다 설명되는 중립적이고 차가운 그런 세상이 된다. 거기에는 자유라든지 도덕법칙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번 생각의  순서를 바꿔서 우리가 이성을 발휘하는 그리고 우리가 도덕적인 생각을 하는 그런 정신적인 생활의 관점에서부터 한번    세상을 바라본다면 거기에는 자연에 대한 정보들로 부터는 단순히 설명이 안 되는 그런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칸트는 생각했던 것 같다. 한번 이렇게 생각을 해보자. 우리는 세상의 자연 과학적인 법칙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서 열역학 법칙이 존재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 법칙이 이 세상의 모든 사건들과 모든 존재자들의 적용 된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신기하게도 단순히 열역학 법칙에 따라서 존재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이성의 힘을 통해서 그 열역학 법칙 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해를 하게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열역학 법칙에 대해서 이해를 하는 것은  열역학 법칙에 따라서 존재하는 것과는 어떤 다른 차원의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즉 세상의 다른 모든 존재자들은 열역학 법칙의 적용을 받으면서 존재 하기만 한다. 그러나 우리 이성을 가진 존재자들은 열역학 법칙에 따라 숨도 쉬고 움직이기도 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 열역학 법칙을 나의 편에서 이해를 하는 굉장히 신비로운 일을 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열역학 법칙은 단순히 자연을 들여 본다고 해서 거기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이성적 능력을 통해서 그것을 이해하고 오히려 그 법칙을 근거로 다양한 자연적 인과관계들을 나름대로 설명하는 그런    종류의 원리인 것이다.

 

이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칸트는 도덕이라는 것도 단순히 우리가 자연적인 인과법칙에 따라서 행동하는 그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 법칙, 삶의 의미, 가치 등에 대해서 이해하는 그런 이성의 영역에 자리를 잡고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가 도덕법칙은 자연적인 인과관계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도덕법칙이 우리의 삶을 설명하고 이 세상을 설명하는 중요 원리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법칙을 이성을 통해서 인식할 수가 있다.

칸트가 생각하기에는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이성을 통해서 법칙을 이해하고 그 법칙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다는데있다.

만약 예를들어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한다 라는 것이 진정한 도덕법칙이라고 이성을 통해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 법칙을 쫓아서 살아가도록 결심을 할 수가 있다. 근데 한번 자연 안을 들여다보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법칙 같은 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성의 능력을 통해서 그 자연현상들 이상의 도덕법칙을 인식할 수가 있고 그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인식한 법칙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가 있다. 칸트는 바로 여기에 인간의 진정한 자율성과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했다.  물론 내가 결국에 그 도덕 법칙을 지키며 살아가냐 또는 법칙을 지키지 않으면서 살아가느냐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가면서 어떤 경험들을 얻었는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그런 자연적인 인과관계에 의해서 상당부분 결정이 되겠지만 최종적으로 그 도덕법칙을 진정한 도덕법칙으로서 이성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적인 인과관계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사건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단순히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 예를들어 우리는 인권이라는 것이 존재 한다고 생각을 한다. 인권을 그 자체로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지만 사실 이 세상 자연 어딘가에 인권을 지켜야 한다라는 원리가 숨어 있어서 우리가 그걸 찾아낼 수 있는건 아니다. 자연적인 인과관계를 아무리 잘 들여다 보아도 인권을 지켜야 한다는 그런 명령이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권을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바로 이렇게 그 자체로 지키고 추구해야 할 뭔가가 있다라는 생각이 칸트의 도덕철학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발전 되어온 생각이라고 볼수 있다.

 

칸트의 철학이 우리 삶에 대해서 굉장히 깊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데 칸트는 어떻게든 보편적인 가치를 갖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그 불씨를 계속해서 살리고 싶어 했다. 예전에는 그런 역할을 종교가 했다면 신이라는 이름에

직접적으로 의존하지 않고도 삶에서 어떤 절대적인 기준과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 굉장히 중추적인 위치에 놓여 있는 철학이 칸트의 철학이다.

https://youtu.be/C9bvG2PKX_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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