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세 편의 소설 《유년시절》 《소년시절》 《청년시절》을 하나로 묶어〈자전3부작(自傳三部作)〉이라고 일컫는다. 〈3부작〉이란 말에다〈자전〉이란 두 자를 붙인 이유는 그 내용이 전적으로 작자가 경험한 사실을그대로 묘사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주인공 니콜렌카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마음의 자전〉을 썼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작자가 자신의 내면적 성장과정, 자신의 내면에 실재하는 영(靈)과 육(肉)이 유년시절·소년시절·청년시절을 통하여 끊임없이 투쟁해 가면서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렸다고 보기 때문인 것이다. 《유년시절》은 톨스토이가 24세 때 발표한 처녀작이다. 1852년 9월 6일 당시 가장 진보적 잡지였던〈동시대인(同時代人)〉 9월호에 《나의유년시절의 이야기》라는 제목을 붙여서 L.N이란익명으로 게재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개월 후, 즉 1월호에 톨스토이는 〈현대인(現代人)〉지의 경영자이자 편집인인 당대의 대가 네크라소프에게、「나는《유년시절》이 이 소설의 제1부가 되기를 원했읍니다. 다음은《소년시절》《청년시절》《장년시절》이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자신의 계획을 전하고 있다. 이《유년시절》은 1851년에 착수하여 이듬해 7월경에 탈고한 것으로 추측되며 여기서 그 당시의 작자의 생활과 관련시켜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는 그의 생활과 작품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톨스토이의 방탕과 방비의 시기
1851년이라면 톨스토이가 만 23살이 되던 해이다. 그보다 앞서 스무 살을 전후하여 톨스토이는 그에게 주어진 숙명적인 영과 육의 치열한 내적인 투쟁을 경험한다. 그 몇 해 동안은 확실히 육이 영을 압도한 시기였다. 툴라 시와 모스크바의 경박한 사회적 생활, 사냥과 노름, 집시 여인과의 탐락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방탕과 낭비의 시기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혹은 근위병(近衛騎兵)으로 전전하면서 혹은 돈에 궁한 나머지 툴라 시에서 우편마차의 경영까지 하면서 그는방탕과 낭비의 생활을 거듭했다. 다시 말해서 이시기는 톨스토이의 전락기였던 것이다. 이런 무질서한 수년간의 생활은 톨스토이의 인내의 한계를 넘어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톨스토이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생활은 스스로 어떠한 변경이든 각오해야할 만큼 무질서했고 방종한 것이었다고 했다.
카프카즈로 떠나는 톨스토이
그러나 그의 생활에 변화를 안겨다 준 중대한 기회가 마침내 찾아왔다. 1851년 4월 군대 복무 중인 장형(長兄)이 카프카즈로부터 휴가를 얻어 돌아왔다. 그리하여 1851년 4월 20일 형이 귀대하는 기회를 타서 톨스토이는 형을 따라 원시적인 자연에 파묻힌 카프카즈로 출발했던 것이다. 톨스토이의 출생지이며 유년·소년시절을지냈던 정든 야스나야 폴랴나를 등지고. 모스크바에서 약 2주일 체류한 후 카잔(톨스토이가 두 번이나 입시에 실패하고 세 번째에 겨우 합격, 1년간 대학에 다닌 곳)을 경유하여 목적지로 향했다.
그들은 보통 하듯이 모르네 시(모스크바 남방 4백여 킬로, 돈 강 상류의 도시)와 돈 주둔군 소재지를 지나는 경로를 잡지 않고 사라토프 (보르네쉬 동방 4백여 킬로, 볼가 강가의 도시)까지는 기마로 가고, 그곳에서 소화물편으로 3주일이나 걸려서 아스트라한(볼가 강구 부근의 하항 도시)까지 간 다음 그곳에서 역마로 카자크 마을까지 가는 방법을 생각하여 그대로 실행했다.
부임지에 돌아온 형 니콜라이가 곧 온천에 마련된 환자 요양지 수비 근무를 하게 되어 톨스토이도 따라갔다. 그 촌락은 인구 1,500명이나 되는 큰 마을로서 아름다운 산악지대에 있었다. 마을보다 높은 산중에서 뜨거운 유황천이 분출하고 있었다. 이곳에 대한 인상은 작품 《카자크 사람들》(이 작품은 그 창작된 연대나 작중의 주인공의 연령, 작품 내용으로 보아 장년 시절에는 해당되지 않지만 청년시절에 계속되는 시기의 작자의 생활을 묘사한 것이라고 하겠다)의 제3장에서 주인공 올레닌이 마차를 타고 노가이인 마부와 대화하면서 카자크 마을로 접근하는 장면에서 잘 표출되었다.
톨스토이와 카자크 처녀 마리얀카와의 사랑
카자크 마을의 생활은 젊고 정열적인 작자로 하여금 낭만적 사랑 없이 지나지 못하게 하였다. 여기서 젊은 톨스토이는 카자크 처녀를 사랑하게 된다. 이 사랑의 경위도《카자크 사람들》속에 나타나 있다. 이 작품에는 그의 충족되지 못하는 사랑의 모든 시기가 명백히 묘사되어 있다. 그는 원시적인 자연에 대한 사랑, 그 자연과 융합하려는 열렬한 욕망, 이와 같은 사랑과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는 이유를 자신의 문명적 습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와 자연 사이에는 무엇을 가지고서도 메울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음을 절감한다. 카자크 처녀 마리얀카를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 그대로의 그녀가 문명적 습관이 몸에 밴 자기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고민한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카자크 청년 루카쉬카처럼 되기를 원하지만 끝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때때로「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이 사랑에서 탈출하고, 카자크 청년 루카쉬카와 마리얀카의 사랑에서 자신의 기쁨을 발견하리라」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그 같은 생각은 자신의 연심과 질투심을 공연히 북돋우어 줄 따름이었다. 자기 희생 이런 것은 모두 황당지설이다. 잠꼬대다. 그것은 모두 오만한 수작이다. 마땅히 받아야 할 불행에서의 피난처나 남의 행복에 대한 부러움에서의 구원이다. 남을 위해서 산다. 선행을 한다!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내 마음에는 오직 자기에 대한 사랑과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와 함께 살고, 그녀의 생활을 살고 싶다는 욕구밖에는 없는데……」하고 번민하며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연적 루카쉬카가 아브레크(귀순하지 않은 원주민 용사들의 호칭)와의 전투에서 치명적 중상을 입은 후 마리얀카가 그에게 보인 멸시와 증오의 태도를 보고 나서 두 시간 후 중대장에게 본부에 보내 주도록 청원해 버린다. 톨스토이는 돌아오는 도중 친척의 한 사람인 일리야 톨스토이를 만난다. 그의 소개로 총사령관을 알게 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들의 권고에 따라 톨스토이는 군적(軍籍)을 청원한다. 그는 형이 귀환한 다음에도 근무에 관한 시험과 임관 명령을 받기 위해서 카프카즈에 남았다. 이때가 1851년 10월이었다.
거기서 톨스토이는 어릴적부터 진심으로 사랑하여 왔던 숙모 타치야나 알렉산드로브나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띄웠다. 숙모님, 숙모님은 언젠가 나에게 소설을 쓰라고 권고하신 것을 기억하고 계시죠? 지금 나는 숙모님의 권고에 따르고 있읍니다. 제가 쓰고 있는 것이 언제 세상에 나올지는 아직 알 수없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나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어 이제 내가 그것을 버리기에는 너무나 깊이 들어가고 만 것 같습니다…… 이때만 해도 미래의 대문호는 아직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 채 겸손하게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톨스토이의 세 가지 열광적 감정
톨스토이는 건강을 해쳐 약 두 달 동안 휴양하고 있었다. 그는 자유롭고 고독한 시간을 이용하여 최초의 소설을 쓰는 한편 시간을 내어 군적을 얻으려고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필요한 서류를 구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매우 곤란한 문제였었다. 마침내 톨스토이는 1852년 2월 포병 중사의 계급으로 출정하게 되고, 그리고 동년 5월에 전지(戰地)를 떠나 본부로 되돌아온다. 이 시기에 쓴 그의 일기에는 자신이 정한 도덕적 이상에 방해되는 세 가지 커다란 열광적 감정을 자신 속에 발견하였다고 적혀 있다.
첫째로 노름에 대한 열정은 점점 과격한 감각을 지향하는 습관이 붙는 것이며, 사욕에서 나온 것이다. 둘째로 정욕은 육체적 욕망이다. 상상에 의해서 촉진되는 육체 그 자체의 욕망이다. 그것은 제어하려 들면 들수록 더욱 더 강해 진다. 따라서 이 욕망과의 투쟁은 매우 곤란하다. 최선의 방법은 근로와 노작이다. 세 번째로는 허영심이다. 이것은 타인에게는 비교적 적은해를 끼쳐 주지만 자신에게는 가장 무서운 해인 것이다.
이어서 다음과 같은 귀절이 있다. 어느 시절부턴지 생애의 중요한 몇 해를 허송했다는 후회가 몹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무언가 좋은 일을 하려고 했더라면 능히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느끼기 시작하면서 부터의 일이다. 자신의 도덕적 발전 과정에 대해서 쓰는 일은 틀림없이 흥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비단 말뿐만 아니라 사상조차 부족하다. 위대한 사상에는 한계가 없는 법이다. 벌써 오래 전에 여러 작가들이 사상의 표현에 있어서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나의 가슴 속에 무엇인가 있어 그것이 나로 하여금 다른 보통 사람들처럼 되기 위해서 세상에 나오지는 않았다고 믿게 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 귀절은 막연하나마 자신의 사명에 대한 최초의 자각이었다. 이 말은 처녀작《유년시절》을 완성하기 전에 썼다는 것을 상기하여야 할 것같다. 이런 막연한 사명감은 그의 모든 위업을 이루게 한 원동력이 되었고, 그 자신의 내부에 신비한 힘을 느끼게 한 최초의 독자적인 자각이라 할수 있겠다.
톨스토이 소설 유년시절에 대한 회답을 받다
1851년 5월 그는 휴가를 얻어 고질병 류우머티즘을 치료하러 파찌고르스크 온천으로 갔다. 거기서 병치료와 더불어 마침내 7월 1일 《유년시절》을 탈고했다. 며칠 뒤 그 원고를 페테르부르그의〈현대인〉지에 보냈다. 그리고 8월 5일에 휴양지를 떠나 자기 부대로 돌아왔다. 그 도중의 감상을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미래는 현재보다 더욱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만일 우리가 내세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도 역시 좋은 경향이다. 그러나 현세에 사는 일, 즉 현세에서 최선의 방법으로 사는 일, 그것은 현명한 방법이다.」 그 이것은 그의 그 당시의 세계관의 주요한 근저였다고 하겠다.
8월 7일 그는 임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카자크의 일상생활의 소박하고 단순한 분위기에 파묻힌다. 「단순 -이것이야말로 내가 무엇보다도 구하고 싶은 성질의 것이다」라고 그는 자기 일기에 적고 있다. 그러던 중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날이자 그의 생애에서 기념할 만한 여러 날 중의 하루가 닥쳐왔다. 즉 당대의 대가 네크라소프가《유년시절》의 원고를 보고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내왔던 것이다. ……「옥고(玉稿)는 매우 흥미있는 것으로 지상(誌上)에 게재하겠읍니다. 속고(續稿)를 보지 않아 아직은 속단을 내리기 어려우나, 이 작자는 매우 재능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무튼 이 작자의 경향, 즉 내용의 순수성과 진실성이 그 작품을 불멸의 가치로 빛내 주고 있읍니다. 만일 속고에서 더욱 생기와 약동성을 가미해 준다면 이 작품은 훌륭한 소설이 될 것입니다. 속고를 나에게 보내 주시도록 부탁드립니다. 귀하의 작품과 재능은 한결같이 나의 마음을 끌고 있읍니다. 그리고 만일 귀하가 문단의 일시적 객인이 아니라면 익명을 쓰시지 말고 당당히 본명을 써서 발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하시기 권하는 바입니다.」
이 서한을 받은 1개월 후 9월 5일부의 제2 서신이 도착했다. 「....읽기 힘든 원고가 아니라 교정 인쇄로 다시정독해 본 결과 이 작품이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것임을 발견했읍니다. 이 작가가 천분을 가졌다는 것을 이제는 확언하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한 확신은 처음 시작하는 작가인 귀하에게는 현재로서는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추신: 대략 추측은 하고 있읍니다만, 이 작품의 필자 성명을 명확히 나에게 알려 주시기를다시 부탁드립니다. 그것은 검열 규정상으로도 나에게는 필요한 일입니다.」 이리하여《유년시절》은 크나큰 기대 속에 공개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톨스토이의 생애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다음과 같은 사실도 흥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작가는 자기 일기 속에「9월 30일 네크라소프에게서 편지와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돈은 오지 않았다」고 썼다. 당시 그는 매우 금전에 궁하여 이 처녀작의 원고료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원고료에 대해서 네크라소프에게 편지를 썼다고 추측되고 거기에 대한 네크라소프의 제3서신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최후의 귀신(貴信)에 대한 답장이 늦어진 것을 용서하십시오. 내가 너무나 바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금전 문제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앞서 올린 서면에서도 일부러 침묵을 지켰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나라 일류 잡지에 있어서는 처음으로 사회에 추천하는 신진작가의 처녀작에 대해서는 원고료를 지불하지 않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어서 〈현대인〉지에 의하여 처음으로 문단에 나선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모두 이 판례에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곤차로프、드루지닌、아브제예프 등 다 그러했읍니다. 전에 내 처녀작도, 그리고 파나예프의 처녀작도 역시 이 관례에 따랐던 것입니다. 따라서 귀하께서도 이 점을 양해하시기바랍니다. 그러나 금후의 옥고에 대하여서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극소수의 필자들이 받고 있는 것과 같은 최고의 원고료, 즉 지면 한페이지 당 은화 25루블리의 원고료를 약속드려 도무방하오며 이것을 조건으로 하겠읍니다. 귀하에게 이 일을 말씀드리기를 주저한 이유는 또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실은 내가 받은 인상을 일반 독자들의 판단에 의하여 확인하기 전에는 서둘러 이와 같은 제안을 귀하에게 할 수 없었던 까닭업니다.」
예술적 창작의 소재로서의 인간의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은 톨스토이 이전에도 수많은 러시아 작가들과 서구작가들이 흥미거리로 취급해 왔지만,그러나 이《유년시절》만큼 어린이와 미성년자의 정신세계에 깊숙이 파고 들어가서 그 발전과 성장과정을 분명히 하고, 그 과정 및 성격형성의 어린이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의존관계를 명백히 한 작품은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톨스토이 마침내 장교가 되다
군대에서 장교가 되려는 톨스토이의 소원은 서류 불비(不備)와 착오로 최초에 생각했던 1년 반의 기간이 그럭저럭 1년이나 초과한 1851년 10월 말에 이르러서도 또다시 3년을 더 근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이 불행을 숙모뻘이 되는 유시코프 부인에게 전했다. 그 결과 어느 고위층에 그 소식이 전달되어 비로소 장교 승진은 빨라졌다고 한다.
1853년 1월 톨스토이가 복무하던 포병대는원정을 떠났다. 실전에 참가한 그는 생명의 위협에도 직면했지만 4월초 무사히 주둔지로 귀환했다. 그 해 6월 그는 적지 돌파 작전에 참가하여 재차 커다란 위험에 부딪쳐 포로로 잡힐 뻔했다. 그때의 이야기가 그의 단편 《카프카즈의 포로》의 줄거리가 되었다.
이따금 부딪치는 위험, 그리고 술과 노름에로의 발작도 이 시기의 작가의 내면적 발전을 저지시키진 못했다. 그러나 그는 단조로운 군대 생활에 권태를 느끼기 시작했다. 1853년 7월과 11월에 각각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터어키와 선전포고한 이 마당에 언제 퇴역이 허용될지 하느님 이외에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참을 수 없는 현재의 생활 양식에 새해에는 변화가 오리라 기대합니다. 우매한 장교들 우매한 대화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없었읍니다. 나는 날마다 아침부터 밤까지 사냥개 한 마리를 데리고 홀로 사냥을 다닙니다. 그것이 유일한 낙입니다. 아니 그것은 낙이라기보다 오히려 자신을 마비시키는 수단입니다」라고 쓰고있다. 이러한 시기에 그는 《소년시절》에 착수하였다.
1854년 1월 3일에는 장교 시험에 합격했고1월 19일 본국을 향하여 출발했다. 약 1개월의 휴가를 마치고 동년 3월 그는 드네프르 파견군에 부임 명령을 받고 다시 출전하게 되었고, 한편 《소년시절》이 〈현대인〉지에 게재되기 시작했다. 톨스토이는 카프카즈 시절을 회상하는 일은 유쾌하다고 했고, 비록 이 시기에 막연히나마 그가 의식하기 시작한 이상에 맞지 않은 일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이때가 그의 생애의 최고의 시기 중 하나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에 뒤따르는 군대 생활의 시기, 그 중에서도 문학활동의 시기(1859 ~ 1860년)는 도덕적 퇴폐기라는 것이다. 실패로 끝난 드네프르 원정, 러시아군의 퇴각,무미건조하고 지루한 참모부의 생활, 이 모든 일들이 톨스토이에게 심적인 불만을 안겨다 주었다.
1854년 7월 그는 크리미아 방면군으로 전속되었다. 여기서 그는 전선 병사들을 위한 평이하면서도 흥미있는 잡지 출판을 계획했다. 그러나 사령관을 거쳐 황제의 재가(裁可)를 얻으려던 것이 실패하고 말았다. 11월에는 격전지 세바스토폴리 포대 근무를 하고 그 후 심페로폴리(세바스토폴리 동북방 약 70킬로)로 부대와 함께 이동했다. 이듬해 1855년 1월 장교 이동에 따라 그는 다시 세바스트폴리에서 약 25 베르스타 떨어진 야영 포병대로 전속되었다. 여기서 그는《청년시절》을 기고(起稿)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사드르2세 톨스토이를 위험한 전투에서 퇴거시키다
1855년 4월 1일 그가 소속한 포병대는 격전 중의 세바스토폴리 요새로 들어갔고, 톨스토이는 여기서 치열한 전투를 경험했다。5월 10일 그의 소설 《1854년 12월의 세바스토폴리》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알렉사드르 2세의 명(이 유능한 청년장교를 위험한 장소에서 퇴거시키라)에 의해 작가는 요새에서 약 50 베르스타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8월 4일 간접적이긴 했으나, 그는 초르나야(黑河) 혈전에 참가하였다. 11월 12일 전지로부터 전령의 임무를 띠고 수도 페테르부르그로 귀환했다. 그는 곧 당시의 대표작가를 거의 총망라한 잡지〈현대인〉동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의 작품들은 그동안 계속적으로 상재되었고 동시에 문명도 급속도로 높아졌던 것이다. 그러나 페테르부르그에서의 톨스토이의 생활은 문자 그대로 방탕한 것이었다. 술, 집시 여인과의 탐락, 도박, 철야 유흥의 연속이었다. 또한 이때는 당대의 거장 투르게네프와의 사이에 불화가 격심해진 시기이기도 하다.
「톨스토이에게는, 문학활동의 찬란한 만개기(滿開期)에 있는 투르게네프가 어디까지나 자제력을 잃지 않고, 또 정신상태가 냉정하다는 사실이 언제나 마음에 걸렸다」는 말은 이들의 불화에 대한 제3자의 견해다. 투르게네프는 톨스토이를 평하여「단 한 마디의 말, 단 하나의 행동도 그 사나이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 없다. 그 사나이는 우리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도무지 볼품이 없다. 저렇게 백작이라는 지위를 자랑하는 어리석음이 그와 같이 똑똑한 인물에게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나에게는 좀 곤란하다」고 했고, 또 파나예프에게도 다음과 같이 톨스토이를 혹평한 말을 했다. 「잿물에 넣어서 한 사흘 동안 끓여 보았자 러시아의 사관에게서 기사의 용맹심을 우려낼 수는 없다. 또 아무리 교육의 칠로 이런 물건을 칠해 보았자 역시 야수의 본성이 나온다. 그리고 그와 같은 야수성은 여러분도 생각하듯이 단 한 가지 남보다 뛰어나려는 헛된 염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혹평에도 불구하고 투르게네프는 많은 사람 앞에서 「나의 재능이 톨스토이보다 못하다」고 솔직히 공언했던 것이다. 심지어 한 프랑스 작가와의 담화에서도 그리스도에게 바친 요한의 형용까지 인용하면서 톨스토이를 칭찬했다. 하지만 끝내 그들은 진심으로 친근해질 수는 없었다.
톨스토이 문학계에 환멸을 느끼다
1856년 3월 톨스토이는 작은 형 드미트리이 사망의 통지를 받았다. 그리고 러시아 터키 전쟁의 종말을 보았다. 동년 11월 26일 톨스토이가 휴직 명령을 받고 군대를 떠나자, 그의 생활에는 개인적 행복을 얻으려는 욕망의 각성을 수반하는 문예계에서의 새로운 활동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준엄한 비평을 서슴지 않았고, 또 당시의 대가들은 그에게 따뜻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지만 톨스토이는〈현대인〉에 집결된 문학자들의 소중한 객인이었다. 그러나 이 서어클은 톨스토이 자신을 조금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즉 자기네들을 인류의 지도자라고 공상하고 있는 그들 문학자들의 도덕적 퇴폐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게된 것이다. 네크라소프의 극도로 사치스러운 식사, 게르센, 오가료프 등의 폭음, 투르게네프의 섬세한 식도락, 그리고 샴페인주, 사냥, 노름 등 유탕의 악취가 충만된 일들을 제외하고서는 생각할 수없었던 그들의 담화! 그 모두가 환멸을 느끼게하는 것뿐이었다.
톨스토이의 소설 청년시절 탈고
이 시기에 그는 《청년시절》을 탈고해서 친우 드루지닌에게 비평을 청했다. 《청년시절》의 발표는 1857년 1월 말에 시작되어 끝난 것은 7개월 후였다. 이 작품 《청년시절》에대한 드루지닌의 비평은 대략 다음과 같다. 「귀하가 시도한 일은 참으로 규모가 큽니다. 현대작가 중에서 무작정 동요만 하는 이 청년 시절을 잡아, 이처럼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은 또 없을 것 같습니다. 진보한 사람들에게는 귀하의《청년시절》은 커다란 만족을 줍니다. 그리고 만일 이 작품이 《유년시절》 《소년시절》보다도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귀하는 그사람의 얼굴에 침을 뱉아도 좋습니다. 귀하의 이 노작 속에는 무한한 시취(詩趣)가 흘러 넘칩니다. 처음의 각장은 모두 잘 되었읍니다. 그러나 다만 첫 시작의 봄날의 묘사에는 메마르고 윤기가 없읍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평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보아 참으로 재치있고 독자적입니다. 귀하에게는 지극히 자세한 부분을 해부 하려드는 특색이 있읍니다. 이 특색은 자칫하면 커다란 결점으로 변하는 수가 있으니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귀하는 극도로 문법을 무시하고 있읍니다. 때로는 언어를 자신의 격조에 따라서 개작하는 시인 내지 문법개혁자들과 같은 문법 무시의 태도로 그런가하면 또 때로는 쉬트에 엎드려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병사의 무식한 태도처럼.」 대체로 보아서 사랑을 기울이고 쓴 각장은 멋있지만 귀하의 감흥이 조금이라도 적으면 문체가 갈피기(轉機)로 하여 신에 대한 관심 - 종교적인 감정이 예술가로서의 톨스토이를 위압하고 강력히 표면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신에 대한 탐색은 50대의 〈위기〉를 맞아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는 1851년 23세 때 이미 다음과 같은 일기를 쓰고 있다. 「나는 발견할 수도 없고 정의를 내릴 수도 없는 인생의 형상, 물질관(物質觀), 그리고 정신적인어떤 경향의 모든 것을 찾고 있다.」 청년 톨스토이의 이러한 탐색은 종교적인 탐색 이외에 달리 볼 수는 없다. 이것은 평범한 대답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최고형(最高形)의 모색인 것이다. 청년 시대부터 잠재해 있던 신과 종교에 대한 이러한 모색이 50대에 이르러 비로소 생명을 내건 필사적인 과제로서 표면화된 것이다.
톨스토이와 종교
그러나 톨스토이의 종교는 재래식의 국가(國家)그리스도교 내지는 교회 그리스도교는 아니었다. 그는 교회가 지니는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고 교회의 모든 형식을 부정하는 현세적(現世的)이면서도 합리적인 종교를 주장했다. 그는 모든 과학적인 발전에 회의를 느끼고 대중의 원시적인 신앙을 따르며 농민의 마음 속에서 진리를 찾았던 것이다. 톨스토이는 자기 특유의 비판적·자연주의적·합리주의적인 경향에 따라 민중의 종교적인 확신의 원인을 규명하고 보다 혁명적인 원시 그리스도교를 설교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격화(神格化), 칠대성전(七大聖典), 예배의 의식(儀式), 삼위일체(三位一體)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인류 문제를 극히 합리적으로 취급하고 인류의 과거나 미래에 관한 역사적 형이상학적인 의론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그는 다만 인류가 문명에 속박되고 국가에 압박되고 교회에 기만당하고 육욕과 탐욕에 의해서 부패되고 있는 것을 인정했던 것이다. 톨스토이는 제도의 개혁에서 기적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노력들을 조소했다.
그가 시인한 또 하나의 환경적인 변경은 인류의 선행(善行)을 방해하는 악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경은 그의 외견에 의하면 도덕적인 개종의 결과로서 얻어진다. 톨스토이가 신의 진리하고는 엄청나게 동떨어진 상류계급의 양심에 호소하고 광명을 본 사람들을 도와주고, 자기 개량의 부단한 노력에 의해서 스스로의 영혼을 구하려고 했던 것도 실은 이 목적 때문이었던 것이다.
톨스토이의 교의(敎義)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색은 그 보편성(普遍性)에 있었다. 그는 모든 종교의 근본적인 진리에 합치할 수 있는 보편적인 종교를 만들려고 애썼다. 이 점에서 본다면 그는 러시아의 정교회(正敎會)를 전 세계의 교회로 만들려고 했던 도스토예프스키나 슬라브파들하고는 판이하다 할 것이다. 톨스토이는 종교적인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는 아니었다.왜냐하면 그는 러시아의 국교(國敎)나 혹은 어떠한 국교의 보편적인 진리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참회》이후 그가 죽을 때까지의 그의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살면서 수많은 종교·도덕·교육적인 논문들을 남겨 놓았다. 그는 〈무저항주의〉를 지상명령으로 보고 어떠한 형식의 폭력도 비난했다. 그의 신념은 일종의 그리스도교적인 사회주의라 할 수 있고 농민의 민주주의 정신과 귀족질서의 붕괴라는 양자(兩者)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평등, 생활의 간소화,반문화(反文化), 반국가(反國家) 등의 사상은 우주의 온순한 주인 모든 일하는 농민과 마찬가지로 소박하고 진실하고 평범한 신(神)의 개념과 굳게 결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무저항을 설교하면서도 자기의 세계를 공격할 때는 성난 사자와도 같았다. 그는 어떠한 권위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당시의 제도·도덕·생활양식을 배척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톨스토이의 비극이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거부·방기(放棄)의 효력은 사랑과 자비를 요구하는 호소보다도 훨씬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모든 점에서 완전무결하게 자기의 교의(敎義)에 철저했다면, 그는 이미 인간이랄 수는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간다운 인간, 성자(聖者)아닌 거룩한 인간 속에서 우리는 가장 다정한 벗으로서의 인간 톨스토이를 볼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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