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파스칼의 생애와 팡세: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연약한 갈대이다

지적허영 2023.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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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즈 파스칼(Blaise Fascal)이 태어나고 활동한 시대는 그리스도교가 한참 권위를 떨치던 중세 문명이 조락(渭落)하고, 신에 대한 맹종에서 벗어나 인간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존엄성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근세와 중세의 과도기이다.

파스칼의 어린 시절 천재성을 보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점차 싹트기 시작한 갖가지 사상적 대립에서 부단히 영향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근세 질서의 일역을 담당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는 1623년 6월 19일 프랑스의 중부 지방 크레르몽에서 징세관(徵稅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귀족 가문은 아니었으나 부친 에티엔 파스칼은 교양 있고 특히 수학과 물리학에 소양이 깊은 그 지방의 유지였다. 모친 앙트와네트는 상인 집안의 딸로 다정다감한 여성이었으나 파스칼이 세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부친은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재혼을 단념하고 오직 자녀 교육에 전심 전력을 기울이고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파스칼의 나이 7세가 되자 부친은 관직을 사임하고 파리로 이사를 했다. 파리에서 부친은 당시의 학자들과 사귀면서 특히 스콜라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갖었으며 전통적 학교 교육에 반대하여 자녀들을 그가 연구한 교육 방법에 따라 교육시켰다. 어린 파스칼은 매사에 의문을 품고 따지기를 좋아했으며 11살이 되는 해에는 식탁의 접시를 칼로 두들겨서 나는 소리를 듣고는 《음향론》을 썼다고 한다. 늦게 라틴어를 배웠으며 라틴어를 배우는 기간에는 그가 좋아하는 수학이나 물리학에 대한 연구는 엄격하게 금지 받았다. 그러나 스스로 삼각형 내각의 합(合)은 180도라는 유클리드의 정리를 증명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마침 그 자리에 들어왔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재능에 감탄한 나머지 눈물이 글썽해서 수학 연구를 허락하기에 이르렀다.

파스칼! 아버지의 일을 덜어 주겠다는 일념으로 계산기를 개발하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당시 나이 11세에 불과했던이 천재 소년은 파리 저명 학자들의 모임인 왕실과학학사원(王室科學學士院)의 회원이 되는 영광을 얻었다. 그의 나이 16세가 되던 해 그는《원추곡선시론(圓錐曲線試論)》을 발표해서 세상을 또 한번 깜짝놀라게 했다. 아버지 에티엔은 다시 관직에 올랐으나 중세(重稅)에 대한 시민의 폭동으로 한때 수난을 입었으나 차츰 시민의 호의를 사게 되었다. 업무에 시달린 아버지의 일을 덜어 주겠다는 일념에서 그는 계산기를 만들기에 정력을 쏟아 마침내 성공했다. 그러나 이무렵 과도한 연구와 공부로 건강을 해치게 되었으며 이후 고생해야만 했다. 그는 또 토리첼리의 진공 실험을 파리에서 재 시험하는데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르왕에서 시험에 착수하여 마침내 24세 때 《진공에 대한 신실험》을 발표하여 또 한번 학계를 놀라게 했다.

자연에 향하던 눈을 인간의 문제로 돌린 파스칼

1646년은 그의 생애에 새로운 전기를 이루는해였다. 의사 데샹 형제의 권유를 받아《내면적 인간의 개혁에 관한 세니우스의 교설》이란 책을 읽고 그리스도교에 마음을 쏟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 같으면 이제 학문을 시작할 나이에 그는 종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이제까지의 자연에 향하던 눈을 인간의 문제로 돌린 것이다. 이무렵부터 그의 건강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1647년 신병을 치료하러 누이 쟈클린과 함께 파리에 갔다. 하체가 마비되어 지팡이가 없으면 기동을 못하게 되었다. 《병의 선용(善用)을 신에게 구하는 기도》는 이 무렵에 써진 것이다. 또 다른 불행이 연달아 겹쳤다. 1651년 7월 부친인 에티엔이 병으로 사망했으며 다음 해에는 누이 쟈클린이 탈속(脫俗)해서 수녀원의 수녀가 되었다.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모든 저술 활동을 중지해야만 되었다.

파스칼 사교계에 잠시 마음을 빼앗기다

1650년 파스칼의 또 다른 시대가 전개된다. 소위〈세속 시대〉로 파리 사교계에 몸을 던진 것이다. 《사랑의 정념에 관한 설》이 그의 작품이라면 이 시기에 있었던 로아네즈 공주와의 사랑의 체험을 쓴 것이리라. 상류 사회의 사교에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옛날 발명한 계산기를 팔기 위해 특허를 얻고 스웨덴의 여왕에게 헌정하는 편지를 내기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사교계도 그를 완전히 사로잡지는 못했다. 무엇인가 허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파스칼, 신을 보다: 확실성, 확실성 감정, 기쁨, 평화

1654년 어떤 신비한 힘에 끌려 파스칼은 신(神)을 다시 의식했다. 그것은 위대한 빛이었으며 그의 생애의 환희였다. 그는 양피지 조각에 그가 본 신을 기록했다. 3페이지의 짧은 《메모리알》에서 그는〈확실성、확실성 감정、기쁨、평화〉라고 썼다. 그리고는 신에 귀의하려는 결심이 생겨 폴르와 데샹 수도원의 객원이 되었다. 이래서 그는 다시 새로운 시대에 돌입했다. 그는 거기에서 비 그리스도교인을 개종시킬 대작을 구상하고있었다. 바로 《그리스도교의 호교론(護敎論)》이라는 책이었다.

산문으로 씌어진 최초의 천재적 작품: 한 친구로부터 어느 시골에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그러나 원장의 부탁을 받고 기학학에 관한 연구서를 쓰느라고 늦어지는 사이 수도원에 큰변혁이 왔다. 폴르와의 지도층의 한 사람인 아르노(Arnauld)가 파리 대학과 정부, 제주이트파에 의해서 고발당하게 되었다. 그곳 사람들은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할 것을 결의하고 파스칼에게 공개문 작성을 위촉하였다. 《한 친구로부터 어느 시골에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가 그 제1의 편지다. 루이 몽탈트라는 가명으로 공표했다. 이 신(信)이 공표되자 4일 후 아르노의 소르본의 학위가 취소되었다. 그래서 계속 2서신, 3서신을 썼다. 다음 해 3월까지 모두18통으로 된 이 편지를 볼테르는 〈산문으로 씌어진 최초의 천재적 작품〉이라 평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의 신앙 문제에 대한 자문에 응하였다. 그 중에는 그가 사랑을 느낀 로아네 공주도 끼어 있었다.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그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듯하다. 모든 세상의 사랑하는 대상에서 애착을 끊고 오직 신에 가까운 신을 닮은 인간이 되고자 고행(苦行)을 시작했다. 자신의 건강이 한층 나빠지기 시작한 1661년경부터 가난한 삶에 애휼(愛恤)을 느껴 그들을 구제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가 장(腸)에 심한 통증을 느껴 병원에 입원을 했을 때의 일이다. 자기는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치료를 받고 있는 반면 가난한 환자들은 버려지고 있는 사실을 알고 그들에게 자기와 같은 간호와 치료를 의사들에게 요구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고 그가 몸소 가난한 사람들의 병상으로 옮겼다. 그리하여 그들 속에서임종을 맞기를 바랬던 것이다. 종부성사(終傅聖事)를 받으면서 「나는 모든 것을 진심으로 믿습니다」하고는 또「주여 나를 버리지마옵소서〉라는 독백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1662년 8월 19일 새벽 1시 39세를 일기로 짧은 생애를 마친 것이다.

파스칼의 사상

그는 실로 다방면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기고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이자 수학자요, 종교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인간 문제와 인간 연구에 관심을 쏟았다. 레비트 교수의 말을 원용한다면 그는 근대 실존주의를 이해하는 데 그의 사상을 빼놓을 수 없다고 했다. 사실 오늘날 많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파스칼의 말을 인용하고 그에게서 무엇인가 얻어 내려고 하고 있다. 파스칼은 데카르트와 동 시대 사람이다. 데카르트의 인간 이성(理性)에 대한 연구는 그대로 헤겔에게 이어졌다. 헤겔 철학에서 실존주의의 비조라고 일컫는 키에르케고오르의 철학이 분파되었다. 파스칼은 지금부터 3백년 전에 이미《팡세》를 통해 데카르트 철학의 모순점을 들어 그의 철학이 쓸모가 없으며 불확실하다고 지적하였다. 파스칼이나 데카르트는 모두 수학적 정확성을 그들의 철학에 도입하려고 시도했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정확성을 문제삼기는 했으나 이론에 불과해서 결국 관념론을 넘지 못하였다. 반면 파스칼은 명실공히 공론을 배격하고 구체적 사실을 명료하고 현실적으로 분석했다. 쟈크 셔발리에 의하면 그의 철학은 공허한 공리공론이 아니고 죽음에 대면한 인간의 절실한 요청에 해답을 던지는 생동하는 관찰이라고했다. 한 마디로 파스칼의 철학은 개인적 구체적 체험을 통해 자각하고 스스로 해답을 구한 직관적인 사상가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철학자들의 철학은 별로 심오하지 않고 평범하다고 일컬어진 것 같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파스칼의 사상은 대부분 문학 작품을 통해서 수필이나 서간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아마 인간의 구체적인 정서나 절박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문학 작품이란 섬세한 그릇이 아니고는 담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철학의 견해를 《팡세》의 브랑슈비크판 단장 1에서 밝히고 있다.

 

〈기하학적 정신이야말로 모든 언어와 명제(命題)를 정의하는 적절한 수단〉이라고 했다. 그리고 일단 그 방향으로 눈을 돌리기만 하면 어느 명제나 원리를 추리하는데 오류를 범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모든 명제나 사례가 이런 기하학적 추리로 해결되지않는 다는 점을 그도 알고 있었다.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문제는 직관에 의한 섬세한 감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사를 있는 그대로 분석해 보면 먼저 비참한 것으로 나타난다. 즉 인간이란 광대무변한 우주나 지구에 비하면 한갓 점에 불과한 존재이다. 이런 생각을 확대해 나가면 무궁한 자연이 우리에게 자료를 제공하는데 지치기에 앞서 인간의 상상력이나 사유가 먼저 피로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있다.

 

인간 자신에 돌아와서 그는 다음과 같은 미세(微細)한 것에 눈을 둘리라고 말한다. 한 마리의 작은 진드기의 어느 부분을 다리의 관절에, 그 관절의 혈관의 피, 피 속의 액체, 액체 속의 물방울 물방울이 다시 수증기가 되는 그 미세한 부분을 우리의 논의(論議)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크며 위대한가를 깨닫고 놀라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한대에 비하면 허무한 존재요, 허무에 비하면 전체로서 결국은 무와 전체 사이의 중간적 존재라고보았다. 이런 논리는 인간의 능력 면에도 나타나고 있다한다.

극과극은 결국 없는 것 같다

즉 감성이 극에 달하면 도리어 아무것도 지각할 수가 없다. 너무 큰 음(音)은 우리를 귀머거리로 만드며 너무 강렬한 빛은 우리의 눈을 부시게 하여 장님이나 다름없게 한다. 또한 너무 멀거나 가까운 사물은 보기에 힘이 들고 너무 길거나 짧은이야기는 무슨 뜻인가 파악하기가 힘이 든다. 너무 진실한 것은 우리를 당황에 빠뜨리고 지나친 쾌락은 결국 우리를 불하게 한다. 화음(和音)이 많은 음악은 싫증을 느끼고, 과분한 은혜는 우리를 나게 만든다. 너무 찬것도 너무 뜨거움도 그것을 느끼지 못한 거와 마찬가지다. 아주 젊은 사람도 너무 늙은 사람도 정신력이 모자란다. 지나친 교육이나 아주 없는 교육도 마찬가지로 해롭다. 그래서 극과극은 결국 없는 것 같다고 피력했다.

행복하고 싶다는 이 욕망은 하나의 천형(天判)이다

인간이란 광막한 우주의 중간에 있으면서 항상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밀려 다니는 존재이다. 무한소(無限小)와 무한대의 사이에 걸려 하염없이 표류하는 비참한 존재이다. 또한 인간의 상상력 자애(自愛)、 모순、죽음、정의 등을 모두 비참한 양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비참한 일면 인간은 위대성을 지녔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비참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위대한 인간이 된다. 나무는 비참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위대하지 못하지만 인간은 비참을 알기에 위대하다는 논리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연약한 갈대이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다. 그를 죽이는데 전 우주가 무장을 하고 나설 필요는 없다. 증기를 이루는 한 방울의 물이면 족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에게 압제를 가하면 사람은 그를 죽이는 우주보다 더 위대한 존재로 변모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가 죽는다는 사실과 우주는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존엄은 생각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또한 다른 장에서는 「나는 손이 없는 사람은 생각할 수가 있다. 또한 발이 없는 사람도 생각할 수있다. 그러나 머리가 없는 사람은 생각할 수가 없다」라고 했다. 비참하고 위대하다는 이율배반! 그래서 그는 인간은 불행하다고 결론짓는다.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신앙 없이는 행복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행복하고 싶다는 이 욕망은 하나의 천형(天判)이다.

 

앞서의 생애에서 언급한 폴 르와얄 수도원에서 제주이트파와 논쟁이 한참일 때 그는 뜻밖의 기적을 보았다. 친척 소녀가 악성 눈병에 걸려 있었는데 그리스도의 형관(刑冠)의 일부에 접촉된 후 안질이 기적적으로 말끔히 낫게 되었다. 그는 이 일에서 느낀 바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일련의 작업에 착수하였으며 1658년에는 이 변증론에 대해 두 시간의 강연을 한 바 있었다. 그후 계속해서 집필을 계속하고 때로는 구술하고 받아쓰게 한 부분도 있어 보인다. 이렇게 계속하다 초고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39세란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이다. 그 초고는 전연 정리되지 않고 판독하기도 어려워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팡세》라는 제명도 사실 파스칼 자신이 붙인 이름이 아니다.

팡세의 진위

초판은 1669년 폴 르와얄판이다. 파스칼의 생질(누나나 여동생의 자식) 엔티엔 페리에가 서문을 붙여 《종교 및 다른 문제에 대한 파스칼의 제사상(諸思想)》이란 제명으로 출 판하였다. 《팡세》라는 말은 이 긴 제목의 마지막 대목인 제사상(諸思想)이란 뜻에서 취했다. 이어 1776년에는 미간행인 단장(斷章)을 보충하여 콩도르세판이 나오고 1844년에는 포제르판이 나왔다. 이 후에도 많은 발간이 있었으나 1897년에 나온 브랑슈비크판이 널리 보급되고 있다.

 

한 가지 더 첨부해 두고 싶은 것은《팡세》의 단장들에 대한 진위(眞僞) 문제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혹자는 제1판인 폴 로얄만이 진본이라 하고 이후에 간행된 것은 모두 가필 삭제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1962년 파스칼 탄생 3백주년을 맞이하여 메나르 씨는 미간(未刊) 단장 1면을 발굴했다 하여 주목을 끌고 있다. 그러나 폴 르와얄판의 서문에 밝히고 있듯 현존하는 어느 것도 파스칼이 당초 계획했던 사상의 전부를 담은 완전한 판(板)은 나온 것 같지 않다.

팡세의 주요 내용

앞서 언급했지만 그는 이 대저를 쓰는 동안 종종 군중에게 이 책의 대요를 설명했었다. 파스칼 생존 당시의 사람의 말을 들으면 파스칼이 구술하던 내용과 사후 발견된 단장들과는 양이나 내용이 엄청날 정도로 빈약하였다 한다. 그의 구술은 〈훌륭하고 강렬하고 감동적〉이었다한다. 먼저 인간의 내면의 정신의 움직임을 이야기하고 그리스도교야말로 자기가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인간의 갈등을 해결해준다. 그리고 이어서 청중들을 여러 학파의 철학자의 세계로 인도를 한다. 그리고 거기서 발견되는 모순·약점·허위 등을 파헤치고 신뢰할 것이 못됨을 이야기한다. 다음 파스칼은 모든 종교에 눈을 돌리게 한다. 그러나 모든 여타의 종교가 허식·우매·오류투성이 임을 폭로했다. 다음에는 화제를 유태 민족에게 돌린다. 그들의 배반이야말로 모든 죄 중에서 가장 크고 구원받을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성서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진정한 종교의 관념을 주고 메시아의 실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책임을 강조한다. 모세와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많은 기적들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한다. 모세의 율법이나 모든 기적은 앞으로 올 메시아의 재림(再臨)에 대한 상징적 의미라고 설명한다.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의 인격·생애기적·설교 등을 들어 가면서 예언이 성취되고 성경에 거짓이 없음을 증명한다. 그런 다음은 사도(使徒)들에게 교활성이나 신심·오류 · 허위성이 있었는가를 묻고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이어 사도들의 문서·기적·순교자 등에 언급하고 그리스도의 진실성을 강조했다. 이상이 파스칼이《팡세》의 구상으로, 아니면 이미 씌어진 단장들을 구술한 내용이었다고 당시 생존자들은 말했다. 이 방대함에 비하면 현존하는《팡세』는 일부에 불과함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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