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저작 티마이오스에 나오는 창조자 데미우르고스를 통해 이 세상의 본질이 무엇인지와 창조원리인 좋음(Goodness)의 실현인 이데아와 현실 세계의 비교를 통해 시인 추방론을 주장하며 예술의 본질에 대해 알려준다.
플라톤: 이데아란 무엇인가
온전함이란 무엇인가?
온전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좋은데 그렇다면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왜 철학 해야만 하는가?
다시 말해 철학은 우리의 온전한 삶에 어떤 호흡을 주는가?
더욱 근본적으로 물어서 온전함이란 과연 무엇인가?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온전함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이 필요하다.
위 질문에 대한 대답을 플라톤 철학에서 구해 보고자 합니다.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의 긴 역사, 즉 2천5백년 서양 철학의 역사는 결국 플라톤 철학의 변주에 불과 하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플라톤 철학이 철학의 전통을 마련했다는 뜻이며 이후 모든 철학은 바로 그가 마련한 철학의 패러다임 안에서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는 뜻입니다.
철학이란 무엇을 어떻게 왜 탐구하는가?
한마디로 플라톤은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이란 무엇을? 어떻게? 왜 탐구하는가? 하는 전통을 마련했던 인물이 라는 것입니다. 그가 마련한 전통 안에서 철학은 만물의 근원(Arche)이자 목적(Telos)이라 할 본질(Essence)을 탐구합니다.
결국 만물의 근원이자 목적은 만물의 존재 이유 한마디로 만물이 존재하게 된 근원. 원인. 목적 그런 것들을 탐구하는 것이 바로 본질에 대한 탐구 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철학은 형이상학이고 형이상학은 곧 존재론입니다.
세계의 창조자, 데미우르고스
플라톤의 저작들 가운데 이러한 어떤 존재론적 원리를 최초로 밝힌 작품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티마이오스 입니다
티마이오스는 이 세계의 창조 원리를 설명하는 저작입니다. 이 세계의 창조 원리를 다룬 작품이 있다면 성서의 창세기도 있겠고 또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도 있을겁니다.
성서에서 이 세계와 우주를 창조한 자의 이름이 야훼 하나님이라면 티마이오스에서는 이 세계를 창조한 자의 이름은 데미우르고스 입니다. 그러나 이 둘의 창조 원리는 약간 다릅니다 데미우르고스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제작자를 뜻합니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는 창조는 아닙니다.
야회 하나님이 이 세계를 무로부터 창조했다면 데미우르고스는 이미 주어진 세계 안에서 어떻게 이 세계의 많은 문화가 생성되는지에 대한 원리를 설명했다는 점에서 순수하게 무로부터의 창조 원리가 아니라 유로부터의 창조 원리를 설명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야훼 하나님이이 세계를 창조할 때 말씀으로 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데미우르고스는 노동을 통해서 자기 머리속에 있는 아주 이상적인 세계를 바깥으로 창조해 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회나 데미우르고스는 철학에서 탐구하는 본질 즉 모든 것이 생겨 가는 원인을 상징하는 신화적으로 인격화한 인물들로 한마디로 그것은 본질입니다.
본질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과연 본질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본질은 제1 원인입니다. 제1 원인 이라는 단어는 아마 First Cause 라는 영어를 번역한 것으로 그것은 최초의 원인, 궁극적인 원인, 원인 중에 원인, 만물의 근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본질은 모든 것이 거기로부터 흘러나오고 모든 것이 거기로 다시 돌아가는 것, 즉 달리 말해서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이유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 존재하게 하는 목적인 것입니다
예술의 본질로부터 바로 예술 작품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예술작품은 예술의 본질을 실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즉 예술 작품은 예술의 본질로부터 흘러 나오고 또한 그러한 본질을 실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예술작품의 원인이자 목적은 바로 예술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본질을 처음이자 끝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종교에서는 그것을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철학에서는 그것을 본질이라는 말로 표현하지만 종교에서는 그것을 신이라고 표현합니다. 철학은 그러한 원리를 개념적으로 표현하지만 종교에서는 그러한 원리를 마치 동화처럼 상징적으로 신화적으로 인격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니 종교의 이야기를 개념적으로 풀어 설명 하면 그것이 곧 철학이 되는 것입니다.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진리 즉 본질은 신학이나 종교학에서 이야기하는 신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종교와 철학을 모두 동일한 것을 표현하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의 원천 궁극적인 원인으로서의 본질입니다.
부동의 원동자
우리는 그것을 '부동의 원동자'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는데 굉장히 어려운 표현입니다. 부동의 운동자, 여기서 동이라는 말은 움직임을 나타내는 단어는 아닙니다. 자기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부동의 원동자의 동은 생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생성 하면서도 자기는 생성되지 아니한 것 이것이 부동의 원동자 입니다.
만일 신이 부동의 원동자라면 신이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 생성된 것이라면 신이 아닐 것입니다. 즉 자신은 부동이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생성하는 원동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생성의 원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동의 원동자란 모든 존재를 생성하게 하면서도 스스로는 생성되지 아니한 것, 즉 가장 근원적인 존재로 본질을 의미합니다.
만약 그 본질이 생성된 것이라면 그것은 그것을 생성한 또 다른 원천이 있을 것이고 그러면 그것은 본질이나 신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부동의 원동자이어야 합니다.
본질은 바로 신이요.
신은 부동의 원동자다.
이것이 본질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창조한 원리로서 데미우르고스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데미우르고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이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탁월하고 가장 좋은 것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창조는 좋음(Goodness)의 실현이다
세상의 창조 원리는 바로 모든 좋음의 실현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데미우르고스는 자신의 관념 속에 있는 아름다운 이상을 현실에 내어 놓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관념의 외화 이며 관념이 모든 것의 존재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그 관념을 이데아라고 불렀습니다
이데아란 형상, 개념, 이념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지만 이런 단어들은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로 제대로 이해 되기 어렵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데아란 우리가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 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세계를 이데아 세계와 현상의 세계로 나누었는데 이런 부분 보다는 이상 세계와 현실 세계 이렇게 구분하면 훨씬 더 이해가 잘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관념 속의 이상을 실현해 놓은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책상 하나를 만들 때에도 우리는 머리속에 있는 가장 이상적인 책상의 이데아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본 떠서 이 세상에 책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을 본떠 만든 그 어떤 책상도 우리 머리속에 있는 이데아 만큼 온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데아가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면 현실 세계는 존재론적으로 그것보다는 좀 덜 떨어지는 더 저급한 세계라고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물을 제작할 때 뿐만 아니라 우리는 친구를 사귈 때에도 우리는 그 친구 관계에서 우정의 이데아를 실현 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우리 머릿속에 있는 그 진정한 우정의 이데아에 비하면 우리의 현실 인간관계는 그것을 모방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게 이상적이거나 아름답지는 않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다가가려고 하지만 여전히 미흡한 것 그것이 바로 현실의 존재론적 지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데아는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이자 모든 이데아의 이데아는 선의 이데아다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선은 여기서는 착하다의 뜻이 아니라 Goodness 좋음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은 좋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데아)은 바로 좋음, 탁월함, 그래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따라서 훌륭한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무엇이 훌륭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탁월한 것인가?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가? 철학은 바로 그러한 앎을 시도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이상을 알고 있어야만 진정으로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념(이데아)이 이 세게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바로 우리 관념의 외화 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이상적인 세계의 모습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그런 세계에 다가갈 수도 없고 그런 세계를 만들 수도 없다는 것이 플라톤의 견해입니다.
**사실 위 말은 맞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내용에 대해 막연하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고객만족 경영 등을 모든 회사가 말하지만 고객만족이란 것의 이상적인 내용을 정의하지 않고는 그것에 다가가기는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플라톤 이야말로 인류 최초의 관념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이상(이데아)으로 부터 생겨 났다는 점에서 플라톤은 세계를 이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로 구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의 형이상학을 초월적 이원론 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플라톤은 이 세계를 둘로 쪼개고 이상의 세계만이 참되고 진실된 세계이고 현실의 세계는 그 진리에는 다가가지 못하는 허위의 세계와 거짓된 세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세계를 우월한 세계로 현실의 세계를 존재론적으로 열등한 세계로 이해합니다.
플라톤의 시인 추방론
여기서 그의 시인 추방론이 등장합니다. 즉 이데아의 세계가 가장 완벽한 세계이고 그것을 본따 만든 세계는 그것보다는 열등한 세계인데 예술가와 시인들은 이 현실을 다시 본따서 예술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즉 이데아의 세계로부터 예술은 두 단계나 멀어져 있다는 겁니다. 현실의 세계도 이미 허위의 세계인데 그 허위를 본따 만든 예술의 세계는 허위의 허위라는 점에서 존재론적으로 가장 열등한 세계라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고 그래서 예술가를 그리스에게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술가들이 만들어 낸 작품들을 사람들이 보게 되면 사람들의 정신은 진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데아를 보면서 이데아를 동경하고 이데아를 사랑해야 하는데 예술가들은 거짓을 사랑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예술은 사람들의 정신을 타락시키는 활동이며 그런 예술 작품을 만들어낸 시인들은 진리의 세계에서 추방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플라톤 예술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데 예술 중에는 현실을 모방하는 예술도 있지만 이데아를 모방하는 예술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플라톤의 예술론
이데아를 모방하는 예술은 사람들에게 이데아를 닮고 싶은 욕망을 불러 일으킨다고 이야기 합니다. 즉 예술 중에서 훌륭한 예술은 인간의 정신을 이데아로 데리고 가나 타락한 예술은 인간을 점점 더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입니다.
즉 예술은 인간을 타락시키기도 하고 인간을 고양시키기도 합니다.
현실을 모방하는 예술은 천박한 예술이다.
그림은 각각의 경우에 어느 것을 상대로 하여 만들어지는가? '실재(이데아)'를 모방하는가, 아니면 보이는것(현상)을 상대로 보이는 그대로 모방하는가? 그것은보이는 현상의 모방인가, 아니면 진리(aletheia)의 모방인가? “그것은 보이는 현상의 모방입니다." 그가 대답했다.바로 그것이네. 모방술은 진실된 것에서 어쩌면 멀리떨어져 있는 것일지 모르네(618). 그것은 실재(Reality)에서 세 단계나 떨어져 있다네 (619)
국가론 10권에 실린 플라톤의 예술 이론
“이데아를 모방하는 예술은 훌륭한 예술이다!"
자네는 호메로스가 가장 시인다우며 비극 시인들 중에서도 첫째간다는 데 동의해야만 하네. 시 가운데서도 신들에 대한 찬가들과훌륭한 사람들에 대한 찬양들만이 이 나라에 받아들여야 할 것들이라는 걸 자네가 알아야 하네. 하지만 만약에 자네가 서정시에서든 서사시에서든 즐겁게 하는 시가를 받아들인다면, 자네 나라에서는 법과 모두가 언제나 최선의 것으로 여기는 이성 대신 즐거움과 괴로움이 왕 노릇을 하게 될 것일세 (637) 그렇다면 좋은 예술은 무엇이고 나쁜 예술은 무엇인가? 모든 걸 파멸시키며 몰락시키는 것은 나쁜 예술이지만 보전해 주고 이롭도록 하는 것은 좋은것일세(641).
위 내용이 플라톤의 예술론 입니다. 이렇게 이데아는 가장 이상적인 형상입니다. 그러한 형상이 플라톤에에게 있어서는 곧 진리입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줍니다. 우리가 예술작품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거나 감동을 느끼는 모든 것들은 이 진리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 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예술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아름답지만 예술 작품이 아닌 것들도 많고 아름답지 않지만 우리 가슴에 영적인 울림을 주는 예술 작품도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보다 근원적으로 예술과 아름다움 사이에 우리는 하나를 더 집어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술은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며 그 진리가 우리에게 내면적인 아름다움과 감동을 자아내는 것입니다.
위대한 예술가는 바로 이러한 진리를 표현하나 저급한 예술가는 진리보다는 이 세계의 현상 원리를 표현합니다. 진리는 아름다움과 감동을 선사 하지만 현실은 그저 쾌락라 즐거움을 줄 뿐입니다.
위 글은 정진우 교수님의 영상을 보고 공부 목적으로 다시 정리한 내용입니다.
출처: 정진우의 철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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