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이성의 권력화’와 ‘계몽의 신화화’ 등을 근대성(近代性)이라고 단정한 후, 근대성을 탈피하기 위해 탈(脫)근대와 반(反)근대를 부르짖고 있다. 데이비드 흄의 철학은, 참된 계몽(啓蒙)을 위해서는 이성의 한계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데서 시작한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자연과학적인 방법을 통해서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흄이 자연과학의 방법을 전적으로 신뢰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자연적 존재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인간으로서는 그 방법의 한계를 알면서도 매달 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실체(實體)를 ‘정신’과 ‘물질’로 구별하고, 정신이 물질을 지배하는 것으로 보는 데카르트 이원론의 피할 수 없는 과제인 상호관계의 작동 원리를 해결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 Gottfried Wilhelm Leibniz(1646~1716)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정신[영혼]적인 원자(原子)에 해당하는 단자[모나드] monad들의 집합이라고 정의한 ‘정신[영혼] 일원론’을 전개한다. 신의 정신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이성적 단자인) 인간의 이성처럼, 인간의 이성보다 열등한 정신의 단자를 가진 자연물들은 인간의 의지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의무가 있으며, 그 복종 여부에 따라 보상과 응징을 받는 것이 정당하고 할 정도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근대의 종교관인 이신론(理神論) Deism에 따르면, 신은 오직 창조주일 뿐이지 인격신 또는 주재자(主宰者)가 아니며 자연은 기계론적 인과법칙에 따라 운동할 뿐이므로, 인간의 이성을 통해 신의 의지와 계획을 모두 알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아일랜드의 성공회 주교 조지 버클리 George Berkeley(1685~1753)는 정신적 실체만을 인정할 뿐, 물질적 실체의 존재는 부정한다. 물체의 존재 여부는 정신의 지각(知覺)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자연계의 현존(現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주재자로서 신의 역할을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반면에 네덜란드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 Baruch Spinoza(1632~1677)의 경우, 무한한 속성(屬性)[본질]을 지닌 자연만이 하나의 실체이며, (정신의 속성인) 사유(思惟) thinking와 (물질의 속성인) 연장(延 長) extension은 자연의 무한한 속성 중 일부가 각각 다르게 드러난 양태(樣態)[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정신과 물질은 상호 독립적이고 동등하므로, 정신이나 물질 중 어떤 것이 다른 것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정신과 물질은 유일한 실체인 자연의 수많은 속성 중 두 가지가 각각 다르게 드러난 양태이므로, 애초부터 분리된 것이 아닌 통일성을 갖는 것이 된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있어선, 처음부터 데카르트 이원론의 문제가 발생조차 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개별적인 것의 존재는 (자기보존을 지속하고 향상하려는 끊임없는 충동이나 욕망이나 정서를 뜻하는 라틴어) 코나투스 conatus 에 의존한다. 그러나 코나투스는 이성의 인도를 따라야 하고, 최상의 행복을 위해서도 이성의 진리 인식이 코나투스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불멸하는 영혼이나 정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선악과 같은 도덕적 개념도 코나투스에 대한 반응의 결과라고 해석했다는 점에서, 도덕률을 경험과는 무관한 (절대적인) 내재적 원리로 보는 이성주의자들의 입장과는 다르다.
경험주의자들은 단순해서 나눌 수 없기에 변할 수 없는 존재라는 실체의 개념 그리고 정신이 물질을 지배 한다는 생각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 Thomas Hobbes(1588~1679)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체이며 단순한 것들의 복합체라고 말한다. 한 개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물질적 요소들은 고유의 기능을 가지며, 이 고유의 기능이 하나의 체계로 통일되어 작용하는 것이 개체의 운동이라는것이다. 근대의 기계론적 자연관을 통해 인간과 인간의 행위를 해석했다. (이런 것이 패러다임 paradigm 의 위력입니다. 계몽주의가 지배하던 시대에는, 모든 것을 이성과 계몽과 진보로 보았듯이 말이죠) 나아가 홉스는 복합체를 자연체 natural body와 정치체 political body로 구별하는 한편, 국가라는 정치체 또 한 다양한 기관으로 구성된 하나의 인격 person이라고 주장한다. 평등한 개인은 ‘자기보존’과 ‘확장’의 원리에 따라 운동한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외부 대상에 대한 ‘욕구’와 ‘혐오’라는 두 가지 정념(情念)의 반 응으로 운동하는 것이며, 선악의 문제 역시 이 두 정념의 반응에 따라 나타난다는 것이 홉스의 주장이다. 즉 욕구의 대상은 선(善)이며 혐오의 대상은 악(惡)이라는 말이다. (벤담에 앞서, 공리주의적 주장을 거의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존 로크 John Locke(1632~1704)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두 실체를 모두 인정하 지만, 실체(實體)[본질]와 양태(樣態)[현상]의 구별을 통해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구별한다. 즉 오직 신만이 실체를 인식할 수 있고, 인간의 지성(知性)은 양태에 대한 지식만을 가질 수 있으며, 인간이 지각 하는 것은 성질들의 다발 bundle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인간에게 금은 노란색⋅(두드리거나 누르면 얇게 퍼지는) 전성(展性) malleability⋅용해 가능성 등의 단순 관념들이 하나로 결합한 복합관념으로 지 각된다는 말이다. 이때 단순 관념들은 모두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지식이 경험에서 비 롯되고, 경험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철학의 쟁점은, 이성이 경험을 초월해서 구성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근원적 진리로 간주해서 그것을 토대로 다른 학문을 정립하려는 이성주의자들[합리론자들]과 이성의 인식 가능성을 경험의 한계 안으로 제한하려는 경험주의자들의 대립이었다. 합리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지식 중 일부는 그리고 아 마도 가장 중요한 지식은 감각 경험과 별개인 이성에 의해 알려진다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철학의 틀로 사용한 것은, 수학 중에서도 기하학이다. 기하학은 (증명할 필요가 없는 자명한 진리로서, 다른 명제를 증 명하는데 전제가 되는 원리인) 공리(公理) axiom에서 시작한다. (공리는 직관(直觀)이라고도 할 수 있습 니다) 여기에 (공리 중 기하학과 관련된 공리인 동시에 철학에서는 엄밀하게 증명되지는 않았으나 어떤 이 론 체계를 전개하는데 근본적인 전제가 되는 원리인) 공준(公準) postulate들이 덧붙여짐으로써, 우리가 증명하고자 하는 정리들을 증명해낼 수 있다. 이때 증명한 결론의 확실성은 전제들 즉 공리와 공준이 보 장해 주는데, 이렇게 전제들로부터 결론의 확실성이 따라 나오는 관계를 연역적 증명 deductive proof이 라고 한다. 경험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은 (라틴어로는 타불라 라사 Tabula rasa인) 빈 서 판 blank slate과 같다는 로크의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 감각이 주어지기 전에는 우리 마음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태어날 때의 마음이 완전히 백지는 아니고, 감각과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구조는 갖춘 백지 라는 말이다. 로크는 가장 확실하다는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본유관념(本有觀念) innate idea인 동일률(同一律)[A는 A이다] law of identity과 모순율(矛盾律)[A라면 A가 아닐 수 없다] law of contradiction마저도, 보편적으로 인정되지도 않고 아이들은 전혀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한다.
흄 역시 (데카르트처럼) 불확실하고 추상적인 것들을 제거해서, 인간에 대한 확실한 과학을 구성해야 한다 는 근대적 과학주의의 기반 위에서 출발한다. 아무리 인식론의 문제가 가로막고 있다고 해도, 1000년간의 신의 지배에서 이제 막 독립한 주체에게 과학은 필연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흄 은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 모든 대상은 동일(同一)관계 equal⋅양적(量的)관계 quantitative⋅질적(質的) 관계 qualitative⋅반대(反對)관계 opposite라는 네 가지 관계로 이루어진 (확실한 지식 knowledge인) 논증[진리]의 영역과 유사(類似)관계 analogic⋅시공(時空)관계[인접(隣接)관계] space-time⋅인과(因果) 관계 causal라는 세 가지 관계로 이루어진 (불확실한 신념 belief인) 사실[개연성(蓋然性)]의 영역 두 종 류로 나뉜다고 말한다. 그리고 논증 영역의 추론을 사실 영역에 적용하는 순간, 확실한 지식[진리]은 신념으로 바뀐다. 예를 들어 일란성 쌍둥이가 서로 닮았다는 건[유사관계]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그 둘이 완전 히 똑같은지는[동일관계]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이다. (데카르트 이후 등장한 인식론의 문제로) 우리가 감각 을 통해 인식한 내용[인상(印象)]과 외부 대상과의 일치 여부는 제삼자를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인상은 지식 즉 진리가 될 수 없다.
우리는 모든 까마귀가 검은 것도 그리고 해가 아침에 동쪽에서 떠오르는 것 모두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손을 비비면 따뜻해진다든지, 나무를 비비면 열이 나고 연기가 나서 불이 붙는다든지 하는 것처 럼 두 개의 현상이 연속해서 나타나는 것이 인과관계이다. 그러나 흄은 경험론의 원칙에 충실하다면, 인과 관계가 존재함을 증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사건 다음에 또 하나의 사건이 뒤따라온다는 사실뿐이다. 인과관계란 시공간적으로 연접(連接) connection한 두 인상(印象)[표 상(表象)]의 관계에 대한 습관적인 판단일 뿐, 언제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인과관 계에 대한 확신 없이는 어떤 법칙도 성립할 수 없으며, 법칙 없이는 어떤 과학적 지식도 성립할 수 없다. 결국엔 흄은 처음 의도와는 반대로, 과학의 진리에의 도달 불가능성을 그러니까 세계에 대한 확실한 지식 이란 획득할 수 없다는 회의론을 입증한 셈이다. 버클리는 정신에 의해 지각된 것을 관념(觀念) idea이라 고 말하지만, 흄은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강도(强度) intensity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적인 차이는 없 는) 대상으로부터 생긴 인상(印象)들의 2차적 결합이 관념이라고 말한다. 흄의 결론은 정신은 실체로서 따 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상과 관념 즉 지각(知覺)의 다발 bundle일 뿐이라는 것이다. 신으로부터 독 립한 주체나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주는 정신 그리고 세상에 단 하나뿐인 고귀한 자아(自我)에 대한 사망 선고이다.
흄은 경험주의를 극한까지 밀고 나간 결과,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던 정신과 주체마저 해체해 버린 것이 다. 이것은 제법무아(諸法無我)[아나타] Anatta라는 불교적인 결론이자, 스위스 분석심리학자 카를 구스 타프 융 Carl Gustav Jung(1875~1961)의 페르소나[가면(假面)] persona 이론과 같은 결론이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1844~1900)도, 가면(假面) 뒤에는 아무것도 없 다고 말한다. 가면 뒤에는 가면을 쓰는 얼굴이 있는 것 아닐까? 얼굴 대신 허공이 있다는 말인가? 둘 다 아니다. 우리는 엄마 앞에선 자녀의 가면을 쓰고, 학생 앞에선 교사의 가면을 쓰며, 사장 앞에선 직원의 가면을 쓴다. 그 각각의 순간에는 그 가면만이 있을 뿐이다. 가면들 뒤에 진정한 ‘나’라는 존재가 따로 있 는 게 아니라, 각각의 순간에 그에 맞는 가면만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도 굳이 무한 소급해서 모든 가면 뒤에 숨은 얼굴을 꼭 찾아보고 싶은가? 불행히도 그것은,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불가능한 질문이다. 언 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언어의 구조를 벗어날 수 없다. 신을 시작도 끝도 없는 존재라고 표현하 는 순간, 신은 언제 태어났는지 신의 부모는 누구인지를 묻는 건 언어의 구조를 벗어나는 것이 되듯이 말 이다. (언어와 관련한 한계는, 모든 무모순적(無矛盾的)인 공리계(公理系)는 참인 일부 명제를 증명할 수 없으며, 스스로의 무모순성도 증명할 수 없다는 두 가지 사실을 포함하는 오스트리아계 미국 수학자 쿠르 트 괴델 Kurt Gödel(1906~1978)의 불완전성 정리 incompleteness theorems(1931)와 연결됩니다)
이제 더 이상 정신은 (신체를 포함한) 물질 또는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다. 정신은 오히려 일종의 신체 반 응의 결과로 전도(顚倒)되었다. 도덕률 또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 convention의 산물일 뿐, 신의 의지나 섭리와는 무관하다. 근대 유럽 철학은 흄에 이르러 비로소 실체라는 형이상학적 망상과 그 망상에 바탕을 둔 이성의 독단(獨斷)과 독선(獨善)의 잠에서 벗어났다. 이성의 한계는 경험이다. 이성 이 경험을 넘어서면 불필요한 사변(思辨)에 빠질 수밖에 없고, 그것은 독단과 독선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흄 철학의 기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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