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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뜻과 유래 배우기

지적허영 2023.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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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파산하재는 당나라 두보의 시로 비록 나라는 망가졌으나 산과 강 자연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의미이다. 그는 안록산의 반란으로 당 나라의 피폐해진 거리를 걸으면서 슬픈 풍경을 보았고 그리하여 그 비애를 많은 시로 노래했는데 춘망도 그 중의 하나다.

국파산하재
국파산하재: 사진출처(pixabay)

국파산하재 國破山河在 뜻과 유래 배우기

출전 出典▲ 당(唐)의 두보작(杜甫作)인 오언율시(五言律詩)「춘망 春望」의 최초(最初)의 一句

 

당나라의 두보(杜甫)가 연래의 희망이 성취되어 우위솔부 주조참군(右衛率府胄曹參軍) 이란관직에 오른 것은 43세 때였다. 그럭저럭 희망이 성취되어 앞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있겠다고 생각했을 때 돌연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다.

 

안록산(安祿山)은 북동방의 절도사로서 60만이 넘는 병력을 쥐고 지금의 북경에 가까운 범양(范陽)에 있었으나, 현종 황제의 좌우에 있 는 불충한 신하를 토벌한다고 칭하고 군사를 일으킨게 755년 11월의 일이었다.

 

파죽지세로 남하한 그는 동도(東都)인 낙양(洛陽)을 정월에 함락시키고 대연황제(大燕皇帝)라 칭했다. 그해 5월 장안(長安)도 위기에 빠져 현종 황제를 비롯한 장안에서 사는 관리나 귀족들은 도읍에서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두보(杜甫) 역시 처자가 있는 장안의 동북방인 두메 산골로 목숨을 걸고 탈주했다. 그 시골도 안전하지가 못해 다시 더 깊은 강촌(羌村)이라는 시골로 처자를 소개시킨 두보(杜甫)는 당시 현종의 태자로 서방의 영무(靈武)라는 시골 구석에서 즉위한 숙종(肅宗)의 조정으로 참내(參內)하려고 출발했으나 곧 적병의 손에 잡혀 죄수로서 장안으로 송치되고 말았다.

 

두보(杜甫)는 이렇게 잡힌 몸이 되었으나 다행히도 그의 벼슬은 그리 높지 않았고 또 백발이 성성한 약한 노인이었으므로( 두보는 남달리 조로(早老)했다고 한다) 목숨의 위험을 면했을뿐 아니라 감시도 비교적 너그러웠다.

 

두보는 병화(兵禍)를 입어 볼품 없이 황폐해진 도읍의 모습을 몸소 체험할 수가 있었다. 안록산(安祿山)은 원래 호인(胡人)으로 그는 호인으로 조직된 군대를 기르고 있었다. 억센 호병은 여보란 듯 말을 달리고 부녀자들은 겁에 질려 떨고 거지 행세를 하면서 거리를 방황하는 왕손 공자들도 있었다.

 

두보 자신도 또 남의 눈을 피하듯 장안 거리를 걸으면서 슬픈 풍경을 보았고 그리하여 그 비애(悲哀)를 많은 시로 노래했는데 「춘망(春望)」도 그 중의 하나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그 것은 도읍지(서울)의 건물이 파괴되었다던가 당실(唐室)이 안록산에게 패했다는 그것만이 아니고, 나라가 깨지고 질서도 파괴되고 기구(機構)도 엉망이 되어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란 전혀 없어지고 말았다라는 슬픔을 가리키고 있는 듯 하다.

 

안록산의 난은 그 후 사사명(史思明) 부자(父子)의 난이 되어 뒤를 끌었고 완전히 끝이 나기까지는 9년이 걸렸다. 더구나 당시로서는 세계 제일의 대 국가였던 당나라는 이 난으로 의해 극성기의 질서와 위력을 회복할 실력을 잃고 무인(武人)이 할거하여 그냥 질질 침체 해버리고 만다.

 

즉 당조(唐朝)의 기반은 이 때 깨져 버렸다고 해도 좋다. 나라가 망가지고 만 것이다. 「춘망(春望)」의 전편(全篇)은 다음과 같다.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感時花濺淚 恨別鳥驚心

烽火連三月 家書抵萬金

白頭搔更短 渾欲不勝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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