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전배우기

고사성어 송양지인 宋襄之仁 뜻과 유래

지적허영 2023. 8. 17.
반응형

송양지인은 송(宋)나라 공(公)이 쓸데없는 政(적이 곤란한 틈을 노려 공격하는 것)을 배푼 것을 비꼬는 말로 쓸데 없는 인정(인자함)이란 뜻으로 그 유래는 춘추좌씨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송양지인 宋襄之仁 뜻과 유래
송양지인 宋襄之仁 뜻과 유래

송양지인 宋襄之仁 뜻과 유래

출처.출전 『춘추좌씨전 春秋左氏傳』·『十八史略』

송양지인 宋襄之仁 뜻

宋 성씨 송 襄 도울 양 之 갈 지 仁 어질 인

송나라 양공(襄公)의 (어리석은) 인자함으란 뜻으로 쓸데없는 인정을 배푸는 것을 의미한다.

송양지인 宋襄之仁 유래

송나라 양공(襄公)의 자애(慈愛)(연민)라는 뜻이다. 송(宋)은 은(殷)의 후예로 은의 제사를 단절시키지 않으려는 배려에서 봉해진 소국이다. 따라서 작위는 최고인 공작이기는 하나 당초부터 기반은 약했다.

 

거기다 지리적으로는 남북 세력에 끼어 있어 끊임없이 전화(戰禍)를 입어 국위는 더욱더 떨치지 못했다. 이 소국을 배경으로 패자(覇者)가 되어 보겠다는 어림도 없는 생각을 한 것이 양공(襄公)이었다.

 

재위기간는(B·C 650 ~ 637년)로 동 시기의 제후로서 제(齊)에는 제환공(齊桓公) 효공(孝公), 진(晋)에는 혜공(惠公), 진(秦)은 목공(穆公), 초(楚)는 장왕(莊王)이 있었다.

 

송(宋)의 환공(桓公) 30년, 환공이 병들어 눕게 되었다. 태자인 자보(玆父)는 자기가 물러나고 이복형(異腹兄)인 목이(目夷 - 子魚)에게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말하고 나섰다.

 

하나 환공은 태자의 생각은 훌륭하다고 인정했으나 그것을 채택하지는 않았다.

 

다음 해인 31년 봄에 환공이 죽자 태자 자보(玆父)가 즉위했는데 이것이 양공(襄公)이다. 양공은 목이(目夷)를 재상으로 맞이했다. 마침이 때 제환공이 제후를 규구(葵丘)의 땅으로 소집했다.

 

양공은 아직 부군(父君)의 장례를 끝내지 못했으나 그 소집에 응했다. 양공 7년, 송(宋)에 천변지이(天變地異)가 계속되면서 심한 비와 함께 운석(隕石)이 퍼부어 내려졌다.

 

그 이듬해 제환공이 죽자 양공은 환공을 대신해서 패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었다. 4년후(양공 20년) 봄에 영내인 녹상(鹿上)으로 초왕(楚王)을 초청하고 자기가 제후의 맹주가 되는 데 대해 양해를 구했다.

 

초성왕(楚成王)은 그것을 인정한다고 대답했다.

 

「소국에는 소국으로서 갈 길이 있읍니다. 맹주가 되려고 하면 반드시 화(禍)를 초래하게 됩니다」 재상인 목이(目夷 - 子魚)가 말렸으나 양공은 듣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 해 가을 제후를 영내인 우(盂)로 불러 회맹(會盟)했다.

 

「아아 일이 잘못되어 가는구나. 이런 야망이 제후를 상대로 통할 리가 없다」 하고 목이(目夷)는 한탄했는데 과연 염려한대로 초왕(楚王)은 회맹석상에서 양공을 잡아 놓고 송에 공격을 가해왔다.

 

그 해 겨울이 되어 제후가 박(亳)땅에서 회맹을 했을 때에야 겨우 양공은 석방이 되었다. 하나 목이(目夷)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아직 멀었다. 그냥 끝날리는 없다.」

 

이듬해인 13년 여름에 양공은 초의 속국인 정(鄭)을 공격했다.

 

목이(目夷)는 절망했다.

 

「아아, 이제 송(宋)도 끝장이구나]

 

과연 가을이 되자 초(楚)는 정(鄭)을 구원하려고 송(宋)을 공격해 와 양공은 응전하려고 했다.

 

「하늘은 이미 오래 전에 우리 상(商…殷을 말한다. 송(宋)은 그 후예다)을 버리고 계십니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가망이 없읍니다.」

 

목이(目夷)가 필사적으로 말렸으나 양왕은 듣지 않았다.

 

11월, 양왕이 인솔하는 송군(宋軍)은 초군(楚軍)과 홍수(泓水) 근처에서 마주쳤다. 미처 포진(布陣)을 못한 초군이 겨우 도하를 시작했다.

 

이것을 본 목이(目夷)가 앞으로 나와 「적은 우세하고 아군은 열세하여 정면으로 충돌을 하면 승부가 되지 않습니다. 적이 강을 건너기 전에 공격을 가해야 합니다.」

 

그러나 양공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 틈에 초군은 도하를 끝내고 진형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다시 목이(目夷)가 공격을 진언했으나 양공은 「아니, 진형이 완료된 후라야 한다.」하고 좀체로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결국 적의 임전태세가 완료된 다음 송군은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으나 결과는 참패였다. 양공 자신도 허벅다리에 화살이 꽂혀 부상을 입는 형편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거냐?」 양공을 비난하는 소리로 온 나라 안이 떠들석했으나 양공은 잘못을 인정하려고 하지않는다. 「적이 곤란한 틈을 노려 공격하는 것은 군자가 취할 길이 아니다. 상대의 진형이 정비되지 않았는데 어찌 진격 명령을 내릴 수가 있겠는가」

 

목이(目夷)는 이런 양공의 생각을 가차없이비판했다.

 

「싸움이란 승리가 목적이다. 이 경우 평시의 예의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라면 처음부터 싸우지 말고 노예가 돼 버리면 좋지 않은가?」

 

정(鄭)은 초의 원군으로 위기를 면했다. 그래서 정은 초의 성왕을 지성껏 모셨다. 그런데 귀국할 때 성왕은 정(鄭)의 공주 두사람을 측실(側室)로서 데리고 돌아갔다.

 

정(鄭)의 대부 숙첨(叔瞻)이 지독하게 화를냈다.

 

「야만인 같은 놈이 도저히 제명에 죽지는 못할 것이다. 이쪽이 예법을 갖추고 있는데 그 무슨 짓이냐? 그래서는 도저히 패자는 되지 못할것이다.」

 

이해 진(晋)의 공자 중이(重耳)가 망명하는 도중 송(宋)에 들렸다. 초(楚)에게 혼이 난 후라 장래 진(晋)의 원조를 얻으려는 생각에서 양공은 중이(重耳)를 후하게 대접하고 선물로서 말 80필을 보냈다.

 

그러나 1년후 여름 홍수 싸움에 입은 상처가 원인이 되어 양공은 덧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양공은 홍수(泓水) 싸움에서 패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자(識者)들 사이에서는 양공을 찬양하는 견해가 있다. 그 까닭은 예의가 무너져 가는현상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견해로 보면 양공의 예의심은 찬양 받을 가치가 있다.」

 

이것은 태사공(太史公)의 평이다.

 

『송양지인(宋襄之仁)』하면 일반적으로 『무익한 정』을 뜻한다. 공리적(功利的)인 생활에 길든 눈에는 송양공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비치나 사마천의 양공에 대한 평론은 의외로 높다.

 

2023.08.17 - [중국고전배우기] - 소심익익 小心翼翼과 소담 小膽 뜻과 한자 유래 배우기

 

소심익익 小心翼翼과 소담 小膽 뜻과 한자 유래 배우기

대담하다 할때 '대담'의 반대말은 소담(小膽)으로 그 유래는 '소심익익'이란 성어에서 왔습니다. 원래 '소심익익'은 자신의 마음을 작게 하고 공경한다는 뜻이었으나 현대에는 마음이 작고 약하

ryooster.tistory.com

 

반응형

댓글

💲 흥미로운 이야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