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림하면 푸르르 숲이 생각나시나요? 그런데 녹림에는 도둑이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한말 시대로 왕망이 신(新)이라는 나라를 세우면서 백성들이 삶이 피폐해지는데 이때 녹림산에서 웅거산 도적들이 스스로를 녹림병으로 칭하게 됩니다.
녹림 綠林 과 녹림병의 뜻과 유래 배우기
出典◀『漢書』王葬傳·『後漢書』劉玄傳
녹림( 綠林)의 뜻
녹림은 푸른 숲이란 의미이지만 도적의 소굴이한 뜻도 있다
綠 푸를 록(녹) 林 수풀 림(임)
녹림( 綠林)의 유래
전한말(前漢末) 대사마 왕망(王葬)이 마침내 왕위를 빼앗아 천자가 된후 국호를 신(新)이라고 고치고 나서 새로운 정책이 눈코 뜰새없이 쏟아져 나왔다.
관직도 바뀌고 지명도 바뀌었으며 토지의 겸병(兼併, 둘이상을 합쳐서 소유)을 없애고 노비를 해방한다고 하며 「왕전제도(王田制度)」와 「노비제도(奴婢制度)」가 정해졌으나 결과는 도리어 반대였다.
난해한 세칙에 걸려 도리어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는 자가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었다. 화폐가 8년 동안에 4차례나 바뀌고 「오균(五均)」기타 경제 정책이 공포 실시됨에 따라 제도의 선전과는 다르게 일반 백성의 생활은 더욱 더 괴로아졌다.
많은 농민이나 상인이 생업을 잃게 되었으며 농촌은 황폐해 갔다.
이로 인해 왕망은 당시 세력이 커진 지방호족과 민중 쌍방으로부터 원한을 사게된다. 이 혼란 속에서 천봉(天鳳) 2년(AD 15년) 서북 변경의 농민이 폭동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대규모적인 반란이 계속해서 폭발했다.
이때 천봉(天鳳) 4년 남방에서는「녹림병(綠林兵)」이 일어났다.
호북 서부는 그때까지 수년에 걸쳐 가뭄이 계속되어 굶주린 농민은 야초(野草)를 캐기 위해 다투고 있었다. 이 다툼을 진정시켜 신망을 얻고 있던 것이 신시(新市)의 사람인 왕광(王匡)·왕봉(王鳳) 두 사람이었다.
수백명의 농민은 이 두 사람을 앞세우고 폭동을 일으켰다. 잠시후에 마무(馬武)·왕상(王常). 성단(成丹)등도 가담했다. 이들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궁민(窮民)으로 관에 반항하여 수배된 자들이었다.
그들은 군도(群盜 도둑의 무리)가 되어 지주의 창고를 습격하고 관원을 공격하고 나중에는 지금의 호북성 당양현에 있는 녹림산에 웅거했는데 동조자는 곧 7~8천으로 불어 스스로를 「녹림병」이라 칭했다.
그후 4년 그들은 2만의 관군을 격파하고 그 기세는 5만이라 칭하며 녹림에 웅거하고 있었다(『漢書』 王葬傳· 『後漢書』 劉玄傳)
이 녹림군의 행동은 각지의 반란을 유도 궐기하게 했다. 녹림의 군사들은 후에 산에서 내려와 하강병(下江兵)·신시병(新市兵)이 되나 뒷날 후한(後漢) 광무제가 된 유수(劉秀)·유현(劉玄)이 일어나자 이들은 합세해서 반왕망(反王葬)의 대군이 된다.
이 역사의 큰 흐름 속에 가담해서 녹림병들도 혹은 영달하고, 혹은 멸망했다.
후에 후한(後漢) 중흥(中興)에 공이 있었던 28 숙(宿)이 정해졌을 때、앞서 말한 두목 중에서는 마무(馬武)가 이름을 전하고 있다. 이름도 없는 군사의 앞길은 원래부터 알 수 없다.
여기서「녹림(綠林)]이란 말이 생기고 도적이란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틀림없는 군도들이었다. 그러나 유서(由緖)로 보아도 민중에게는 도리어 가까왔기 때문인지「녹림의 호객(綠林豪客)」이란 이야기는 인기가 있는 것 같다.
수호지(水滸誌)도 녹림호객의 이야기다. 그리하여「동은 동、서는 서]도 아니다. 로빈후드의 근거지도 샤우드의 숲이 아니었던가. 하여튼 지배(支配)에 고생하는 민중에게는 녹색이 깊은 산중이 어지러운 시대에 사는 백성들에게 꿈을 안겨다 주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2023.07.22 - [중국고전배우기] - 노즉기린불여노마 老即麒麟不如駑馬 고사성어 뜻과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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