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노블리스오블리제를 실천한 인물이 이름을 하도 많이 바꾼 범려(또는 치이자피 또는 도주공)이 아닌가한다? 수많은 부를 쌓고 아낌없이 나눔을 실천한 인물. 陶朱猗頓之富 (도주의돈지부)는 도주(공)와 또다른 부자 의돈과 같은 큰 부를 의미한다.
부자가 꿈이시라면 도주의돈지부의 뜻과 재미난 유래를 확인해보세요!
陶朱猗頓之富 (도주의돈지부) = 陶猗(도의) 뜻과 유래
출전 出典 『사기 史記』 화식전 貨殖傳
陶朱猗頓之富 (도주의돈지부) = 陶猗(도의) 뜻
陶 질그릇 도 朱 붉을 주 猗 불깐 개 의 頓 조아릴 돈 之 갈 지 富 부유할 부
도주는 사람이름으로 월나라 명신 범려를 말한다
의돈도 사람이름으로 노나라 부자였다
즉 도주와 의돈같이 아주 큰 부를 이룩한 것을 의미
陶朱猗頓之富 (도주의돈지부) = 陶猗(도의) 유래
도주(陶朱)란 월(越) 나라의 명신 범려의 늙었을 적 이름이다. 주경왕(周敬王) 26년(B.C 497년) 월나라 왕 구천(越王 勾踐)은 범려의 간지(諫止)를 듣지않고 오왕 부차(吳王夫差)와 부초산(夫椒山)에서 싸워 크게 패했으며 수천의 패잔병을 이끌고회계산(會稽山)으로 도망쳤으나 오군에게 포위되어 어떻게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구천은 범려의 간언을 듣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고 그의 조언(助言)을 구했다. 범려는 어떠한 굴욕이라도 참고 화해를 청하여 후일 재기할 것을 권했다. 구천은 그 말을 따라 오에게 항복했다.
이후 범려는 구천을 도와 오로지 부국강병에 힘써 각고(刻苦) 20년 끝에 드디어 오를 멸망시키고「회계의 치욕」을 씻었으며(주원왕 周元王 3년 B·C 473) 월 나라를 천하의 패자가 되게 했다.
구천이 패자가 되자 범려는 상장군이 되었다.
하나 범려는「제후의 밑에서는 오래 있을 수가없다」하고 또 구천의 됨됨이가「함께 환난은 같이 해도 함께 태평 세월은 보내기 어렵다」고하며 그 일족과 함께 월에서 떠나 제(齊)로 옮아갔다.
제(齊)에서 범려(范蠡)는 성명을 바꾸어 치이자피 (鴟夷子皮)라 호하고 장사를 해서 전에 월나라를 부하게 한 계연(計然=일설에는 범려의 서자(著書)의 이름이라고 하나 잠시 통설(通說)에 따라 범려의 스승으로 해둔다)의 책략을 따라, 물자의 과부족을 생각하여 비쌀 때는 분토(糞土)를 버리 듯아낌 없이 팔고、쌀 때에는 주옥(珠玉)을 구하듯 아껴 사들여 순식간에 천만의 부를 쌓았다.
호(號)인 치이(鴟夷)란 가죽 부대란 뜻인데 필요하지 않을 때는 작게 접어둘 수가 있으나 물건을 넣을 때는 크게 벌릴 수가 있다는 뜻이다.
제(齊)나라에서는 그의 현재(賢才)를 아껴 재상으로 맞이하고자 했으나 그는「집에 있어서는 천금을 벌고 관에 있어서는 경상(卿相)이 되는 것은 영화(榮華)의 극(極), 오래 존경을 받는 것은 몸에 좋지 않다」고 그것을 거절함과 동시에 수천만의 재산을 남김 없이 남(他人)에게 나누어 준 다음 다시 도(陶)로 떠났다.
도(陶)에서 그는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이곳을 택한 것은 이 곳이 제후의 나라와 사방으로 교통하는 물자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이름을 주(朱)로 바꾸고, 거래선을 잘 골라 기회를 잡아 물자를 유통시켜 다시 수천만의 부(富)를 쌓아 도주공(陶朱公)이라 불리웠다.
그는 19년 동안에 세 번이나 거만의 이익을 얻어 그 중 두번 씩이나 이를 나누어 빈민에게 주었다. 후년 노쇠하자 가업을 자손에게 맡겼으나 자손도 또 교묘하게 생업을 운영해서 더욱 더 그 부는 커졌다고 한다.
의돈(猗頓)은 춘추 때 노(魯)나라 사람이다. 원래는 궁사(窮士)였으나 소금과 목축으로 부를 쌓아 의씨(猗氏)에 살며 왕공을 능가하는 생활을 했다。그래서 의돈(猗頓)이라 했다.
이런 까닭으로 세상에서 부를 운운하는 자는 도주공을 말하거나 의돈(猗頓)의 이름을 말한다 - 『史記』 화식전 貨殖傳
여기서 부자(富者)을 가리켜「도의(陶猗)」라 하고 그 부를「도주 의돈의부」라고 하는 말이 생겼다.
2023.07.26 - [중국고전배우기] - 도연명의 도화원기 속 도원경과 무릉도원 뜻과 유래 배우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