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단 月旦은 매달 초 하룻날이란 뜻으로 월단평(月旦評)의 줄임이다. 허소(許劭)란 인물이 자기 동내 사람들에 대해 인물을 골라서는 비평하면서 유명해졌고 조조도 허소로부터 난세에 알맞는 간웅(姦雄)이 될 인물이라는 평을 듣게 된다.
월단 月旦 뜻과 유래, 조조를 평한 허소(許劭)
월단 月旦 뜻과 한자
月 달 월 旦 아침 단 評 평할 평
매달 첫날의 평(評)」이라는 뜻으로 인물에 대한 비평(批評)을 이르는 말로 보통 월단으로 줄여서 말하기도 한다.
월단 月旦 출처와 유래
출처.출전: 십팔사략 十八史略
후한(後漢, 35~220)시대도 전한(前漢) 시대와 마친가지로 황후의 일족(외척)과 환관(宦官)세력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제10대인 환제(桓帝)때 그 환관들이 결속하여 기개와 절조가 있는 선비 백여명을 죽인 「전당고(前黨鋼禍)의 화 - 166년」가 일어나고 다음 영제(靈帝)때는 7백여명이 살해되고 다시 그 문하생에서 친구 친척까지 유형이나 투옥을 당한「후당고(後黨鋼禍)의 화 176년)까지 생겼다.
이런 사건 때문에 정치는 어지러워지고 한실의 위광(威光)도 쇠해져 천하는 소연(騷然, 시끄럽고 수선스러움)해지기 시작했으나 이것에 박차를 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것은「태평도(太平道)」라는 사교의 유행이다.
「태평도(太平道)」란 하북(河北)의 장각(張角)이라는 사나이가 시작한 당시의 신흥종교이나, 황제(黃帝: 3황5제의 한사람)나 노자(老子)의 학설에 엉터리 이론을 붙인 것으로 정치가 올바르지 못하면 민중이 이런 것에서까지 구원을 찾게 되는 것으로 어쨌든 천하가 소연해진 틈을 타 순식간에 수십만의 신도를 모으게 되었다.
이렇게 세력을 얻은 장각(張角)은 이번에는 천하를 자기의 소유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야망을 일으켜 영제(靈帝) 17년(一184년)에 종도(宗徒)를 이끌고 군사를 일으켰다.
그 기세가 성해서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반란군은 자기들을 표시하기 위해 황색건(黃色巾)을 쓰고 있었으므로「황건적(黃巾賊)이라 부르고, 이 난을「황건의 날」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쯤 되면 궁정 안에서 권모술수에 의 남을 해치는 재주 밖에 없는 환관으로서는 손을 쓸 수도 없었다. 당고(黨鎭)의 화가 일어났을 때 잡아 감금했던 인사(人士)들을 허겁지겁 풀어주어 토벌을 시킴과 동시에 전국의 유력자들에게 누구누구를 가리지 않고 토벌을 명했다.
무슨 일이 생겼으면 하고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고 있던 야심만만한 패거리들은 다투어 군사를 일으켰는데 그 중에도 지모(智謀)에 뛰어난 조조(曹操)는 반란군을 크게 격파하고 천하에 이름을 올렸다.
그 밖의 사람들도 용전하여 각지에서 반란군은 마구 무찔러져 격파되고, 수령 장각도 병사하여 그렇듯 기세를 올리던 대란(大亂)도 겨우 끝장이 났다.
그러나 수그러지지 않는 것은 군사를 일으켰던 패거리들로 그들은 들어올렸던 주먹을 내리칠 곳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거병(擧兵)의 명목을 「횡포한 환관을 응징한다」로 변경하고 군사들을 그대로 이끌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영제(靈帝)가 재위 10년에 죽자(188년) 원소(袁紹)라는 장군이 먼저 일어나 군사를 이끌고 궁중으로 난입하여 환관이란 이름이 붙는 자 2천여명을 모조리 죽였는데 다시 동탁(董卓)이란 장군도 다음에 즉위한 유제(幼帝)를 쿠데타로 추방시켜 후한왕조(後漢王朝)에 종지부를 찍고 마침내 삼국지 이야기의 발단으로 들어가게된다.
황건적(黃巾賊)을 토벌하여 대공(大功)을 세운 조조는 젊었을 때부터 두목 타입으로 가사는 통 돌보지 않고 호걸들과 교제 하면서 좋아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무렵 하남성(河南省) 여남(汝南)이라는 곳에 허소(許劭)와 그의 사촌형 정(靖)이라는 두 사람의 명사가 살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매달 초 하룻날 향당(鄕黨)의 인물을 골라서는 비평을 하고 있었다. 그 비평이 극히 적절했으므로「여남(汝南)의 월단평(月旦評)」이라고 항간에서 평판이 되어 들으러 가는 사람이 많았다.
이 인물평이 너무나도 유명했으므로 이로부터 인물비평을「월단평(月旦評)」약해서「월단(月旦)」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그 평판을 들은 조조는 곧 허(許劭)를 찾아 가 물었다.
「이 나라는 사람은 어떤 나인지 비평을 해주지 않겠나?」
난폭자로 이름이 높은 조조라 허소도 조심해서 좀체로 입을 열지 않았으나, 조조의 성화에 못이겨 겨우 입을 열었다.
「태평시절에는 당신이 유능한 관료에 지나지 않으나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난세에 알맞는 간웅(姦雄)이 될 인물이다」(治世能臣 亂世姦雄)
이말을 듣고 조조는 즐거워 했다. 그래서 황건적을 토벌하기 위해 거병(擧兵)을 결심했다고 한다(『十八史略).
이때 조조가 허소(許邵)에 가지 않았더라면 아니 허소(許劭)가 그런 비명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삼국지(三國誌)』는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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