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맹장인 이극용은 청년 시절부터 놀라운 용기와 뛰어난 전투력으로 군중들 사이에서 이아아(李鵶兒)로 불렸습니다. 특히, 그의 한눈은 마치 애꾸였으므로 그가 귀하게 되자 사람들은 그를 독안룡이라 호칭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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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 獨眼龍 뜻과 유래
출전 出典』 『오대사 五代史』 당기 唐記
독안룡 獨眼龍 뜻
獨 홀로 독 眼 눈 안 龍 용 룡(용)
애꾸눈의 용이란 뜻으로 당나라 맹장 이극용이 한쪽 눈의 애꾸였기 때문에 독안룡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독안룡 獨眼龍 유래
중국 당(唐)나라 17대 황제 의종(懿宗) 말년(873년) 산동(山東)·하남 지방은 대홍수를 만났으나 이듬해인 18대 황제 희종(僖宗)의 건부원년(乾符元年)에는 같은 이 지방이 전년과는 딴판으로 큰 가뭄을 당하는 불행을 만났다.
그런데 주현(州縣)의 세금 징수는심하기 짝이 없어 농민들은 부득이 그 아내를 팔고 자식을 팔아 겨우 가세(苛稅)를 감당하고 있었으나 이것에도 한도가 있었다.
산동의 일각에서 불타오른 농민 봉기의 불길은 드디어 조주(曹州) 출신인 일대의 풍운아 황소(黃巢)를 궐기시켰다. 황소는 그보다 일찍 이미 난을 일으키고 있었다. 같은 산동의 왕선지(王仙芝)와 손을 잡고 각지를 전략(轉掠)할 때마다 찾아와 투항하는 자들을 합쳐 급속히 그 병력을 증강시켜 갔다.
얼마 안되어 병력 수십만을 헤아리게 된 황소는 광명 원년(廣明元年) 11월에 낙양을 무찌르고 노도와 같이 진격을 계속하여 당의 수도 장안(長安)을 함락시키고 대중의 환호리(衆民歡呼裡)에 장안에 입성하여 스스로 제제(齊帝)라 칭하고서 대제국(大齊國)을 세웠다.
그러나 한편 흥원(興元)에서 성도(成都)로 난을 피하고 있던 희종(僖宗) 측에서도 착착 반격태세를 굳히고 있었다.
즉 당군(唐軍)의 맹장 이극용(李克用)의 등장이다. 극용은 돌궐(突厥)의 사타부(沙陀部) 출신으로 호지(胡地)에 숨어있었으나 황소 토벌에 기용되어 사만의 병(兵)을 인솔하고 하중(河中)으로 진군했다.
이극용은 한쪽 눈이 애꾸였기 때문에 「독안룡(獨眼龍)」이라 불리웠다.
「이극용, 젊어서부터 효용(驍勇)하여 군중(軍中)이 일컬어 이아아(李鵶兒)라 했다. 그 한눈은 애꾸였다. 그가 귀(貴)하게 되자 다시 독안룡이라 호(號)하다」(『五代史』 唐記)
또 「희종(僖宗)때 황소가 반(叛, 배반할 반)하다. 이극용 이를 평정시키다. 때의 사람들은 그의 눈이 애꾸이고 용기 있음으로써 『독안룡』이라 호하다」(『唐書』)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상당한 외포(畏怖)와 존경심을 가지고 그렇게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독안룡 즉 이극용의 군은 전신 흑의를 입고 있었으므로 소군(巢軍)은 그 눈부신 진격에「아군(鴉軍, 鴉는鵶와 같은 글자. 까마귀)이 온다!」하며 두려워 하여 떨었었다고 한다.
그러나 쇠퇴했다고는 하나, 아직 맹위를 떨치는 소군(巢軍)은 산동·하내(河內) 방면의 관군을 석권하고 있었으므로, 이극용은 5만명을 이끌고 스스로 관군의 통수(統帥)로써 산동으로 들어가 황하를 넘는 군에게 일대 철추를 가하고, 이어 하구(瑕丘)에서 결정적으로 소군을 궤주(遺走)시켰다.
여기서 그렇듯 기세를 떨치던 반란군도 토벌되고 황소도 패사(敗死)하고 말았다. 이극용(克用)은 그 공(功)으로 농서(關西)군왕에 봉해졌으나, 소군의 반란으로 전혀 그 위령(咸令)을 잃고만 당조(唐朝)다.
이극용(克用)과 불구대천의 원수를 맺고 있는 주전충(主全忠)과 이극용 두 사람은 조정의 실권을 둘러싸고 심하게 대립하고 있었는데 후에 조정(朝廷)이 주전충(全忠)의 손아귀로 들어가 전충은 애제(哀帝)의 자리를 빼앗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양(梁)이라 칭했으며, 독안룡 이극용은 실의(失意)에 빠진채 세상을 떠났다.
『독안룡(獨眼龍)』이란 척안(隻眼)으로 용기가 있는 사람, 바뀌어서 척안고덕(隻眼高德)한 사람도 이렇게 부른다(전충이 세운 후량(後梁)은 이극용(克用)의 아들인 존욱(存勗)이 쓰러뜨리고 후당(後唐)을 세웠다).
2023.07.28 - [중국고전배우기] - 고사성어 도탄지고 塗炭之苦 뜻과 유래 배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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