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석시 立石矢는 한나자 명장인 이광(李廣)과 관련된 성어로 활쏘기의 명수인 이광이 화살을 쏘았는데 돌에 박혀버렸다는 뜻으로 그 유래는 사기 이장군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입석시 立石矢 뜻과 유래: 이광(李廣)의 무용담
입석시 立石矢 뜻과 한자
立 설 립, 石 돌 석, 矢 화살 시
화살이 서 있는 돌을 꿰뚫다는 뜻이다.
입석시 立石矢 유래와 출처
출처.출전: 사기 이장군전 『史記 李將軍傳 』
많은 명장(名將) 중에도 정말로 뛰어난 명장이 있으니 바로 한(漢) 나라의 이광(李廣)과 그의 손자 이능(李陵)같은 사람이 그와 같은 명장 중에 명장에 속한다.
이광(李廣)의 집안은 선조 대대로 무인의 혈통을 자랑하고 천하에 용맹을 떨친 장군을 계속 배출한 집안으로 호지(胡地)에 가까운 농서(隴西) 출신으로 바로 북에 위치한 오르도스 사막은 흉노(匈奴 - 북방의 유목 야만민족)의 전진기지가 되어 있고 고을의 주변에는 육반산맥(六盤山脈: 닝샤후이쭈(宁夏回族) 자치구 남부에 남북으로 뻗은 산맥)의 지맥이 뻗쳐 있었다.
국경에 인접한 거칠고 전쟁이 잦은 지역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이광(李廣)은 이후 정식으로 무술 훈련을 받게 되자 뛰어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무장의 아들로서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풍채가 몸에 배어 있었고 특히 활을 잘 사용해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文帝) 14년(B.C 166)에 흉노가 대거 숙관(肅關)을 침범했을 때 이광은 많지 않은 부하를 이끌고 흉노에게 절대로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기마전술과 활솜씨를 보였다.
수십년 동안 흉노에게서 고배를 마시고만 있었던 문제(文帝)는 내일같이 기뻐하며 직접 자기 수하에 두고 싶은 생각이 들어 이광을 불러 시종무관 자리에 앉혔다.
호랑이와 맞붙어 보기좋게 때려눕힌 것은 문제(文帝)의 사냥길을 수행했을 때의 일이다. 위기일발 구사일생으로 호난을 면한 문제는 「참으로 그대는 아깝게 되었다. 고조(高祖)시절에 태어나 있었더라면 엄청난 큰 제후로 출세했을지도 모르는데」라고 말했다
「아닙니다. 큰 제후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국경의 수비대장이 소신의 소원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광은 전부터 바라고 있던 변경의 수비대장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그 동안에 세운 공은 수 없이 많았으나 처세술이 서툴렀던 탓으로 관위(官位)는 좀체로 올라가지 않았을 뿐더러 때로는 면직을 당할번 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광 장군의 진가(眞價)를 알고 있던 것은 오히려 적인 흉노들로 한(漢)나라의 비장군(飛將軍)이라 하며 감히 이광이 지키는 성새(城塞)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우북평(右北平)의 흉노 뿐만 아니라 산야를 횡행하고 있던 호랑이에게도 이광은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한번 초원에 묻힌 돌을 호랑이로 잘못 보고 쏘았을 때에는 화살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돌에 박혔다. 돌에 화살이 꽂힌 것이다. 가까이 가보아 돌이란 것을 알고 다시 쏘아본 화살은 돌에 꽂히지 않았다는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이 「일념(一念) 바위를 뚫는다」의 고사다(『史記』李將軍傳)
이것은 이광 장군의 궁세(弓勢)를 칭송하는 사람들의 지어낸 기인지도 모르나 그가 활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수련을 쌓아 얻은 기(技)의 영역을 넘고 있는듯 했다. 그의 궁세가 발군(拔群)했던 것은 그가 원비(猿臂)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마천(司馬遷)은 『史記』 李將軍傳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이광(李廣)은 키가 크고 원비( 猿臂)였다. 그가 활을 잘 쓴 것도 또 천성이다」라고. 여기서 원(猿)이란 원숭이의 팔을 뜻하며 길고 힘이 있어 활쏘기에 좋은 팔을 의미한다.
2023.10.09 - [중국고전배우기] - 일호천 一壺天 뜻과 유래 배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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