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약롱중물 自家藥籠中物의 뜻은 자기 집 약장(약롱) 속의 물건이라는 뜻으로 자기가 언제든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물건을 비유한 말로 당나라 측천무후 시대 적인걸(狄仁傑)이란 명재상(名宰相)의 말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자가약롱중물 自家藥籠中物 뜻과 유래: 적인걸(狄仁傑)
자가약롱중물 自家藥籠中物 뜻과 한자
自 스스로 자 家 집 가 藥 약 약 籠 대바구니 롱(농) 中 가운데 중 物 물건 물
자기 집에 있는 약농(약 바구니)에 들어 있는 물건이란 뜻으로 언제든지 마음먹으면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자가약롱중물 自家藥籠中物 유래와 출처
출처.출전: 出典合十八史略』
당(唐)의 제3대 고종(高宗)의 황후를 무후(武后)라고 한다. 14세때 뽑혀 태종(太宗)의 후궁으로 들어 갔으나 26세때 태종이 죽자 여승(尼)이 되었지만 천성(天成)의 여질(麗質 타고난 청초하고 고운 성품이나 체질)은 31세 때 고종의 눈에 들어 환속하고 다시 후궁으로 들어갔다.
고종 6년 제(帝)는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 왕씨를 폐하고 무씨를 황후로 앉혔다. 무씨의 환속, 황후 책립에 대해서는 그녀의 보통 아닌 권모(權謀)와 술책(術策)이 있었으나, 그런 것을 생각해내고 실행할 만큼 머리도 좋았으므로 고종의 총애는 대단했다.
그러는 동안 눈병으로 고종이 병석에 눕게 되어 무후(武后)에게 정치를 돌보게 하자 머리의 좋음과 함께 한마(悍馬 성질이 사나운 말)의 본성을 갑자기 나타내기 시작하여 스스로 천후(天后)라 칭했으며 고종 이래의 명신(名臣)을 죽이거나 물리치거나 한 뒤 태자인 충(忠)을 제거하고 자기가 낳은 홍(弘)을 세웠다.
얼마 후 다시 그 홍을 독살시키고 동생인 현(賢)을 세웠다가 그것도 폐하고 그 또 동생인 철(哲)을 태자로 삼았다. 그 후 오래지 않아 고종(高宗)이 죽고 태자 철(哲)이 즉위하여 제4대 중종(中宗)이 되자 무후는 겨우 두 달로 중종을 폐했다.
그리하여 먼저 서민(庶民)으로 강등시킨 현(賢)을 죽이고 중종을 귀양보내고 당실(唐室)의 자제나 자기에게 반대하는 자 백명을 죽였는데 67세 때 스스로 제위에 올라 성신황제(聖神皇帝)라 칭하고 이어 국호를 주(周)로 고쳤다.
4천년 중국역사상 최초이며 최후인 여제(女帝)가 출현된 것으로 후에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라는 존호(尊號)를 받게 된 소위 측천무후 (則天武后)다.
그 무렵 적인걸(狄仁傑)이란 명재상(名宰相)이 있었다. 인격이 고결하고 식견이 출중하여 백성들에게서 경애를 받으며 묘당(廟堂)의 인기도 높았다.
무후(武后)의 즉위를 기회삼아 무씨일족 중에는 이 기회에 여제(女帝)를 농락하여 제위(帝位)를 양도받고 황제가 되려는 불손한 생각을 품는 자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무후도 어느정도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던 듯했다.
이에 놀란 적인걸은 장간지(張柬之)와 함께 정색을 하며 무후를 간했다.
「친아드님이신 중종(中宗)께서 엄연히 살아계신데도 불구하고 남에게 제위를 양도하신다는 것은 천의(天意)에 위배될 뿐 아니라 그렇게 되면 종실(宗室)의 안전은 보존되지 못합니다. 종황제께서 천군만마 즐풍목우(櫛風沐雨)의 고생을 하신 것도 오로지 자손의 장구(長久)와 천하의 태평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것을 타족(他族)에게 넘기시다니 그 무슨 일입니까? 폐하는 도대체 자신의 아들과 백숙모와 질(姪)과 어느 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말에는 어지간한 측천무후 (則天武后)도 반론(反論)의 여지가 없어 그 움직임은 마침내 봉쇄되고 말았다. 결점투성이인 측천무후 (則天武后)였지만 제위(帝位)에 올라 천하를 쥐고 흔드는 솜씨는 남자 못지 않아서 재색겸비, 지능준민, 사려 깊고 그 재단은 명쾌하여 곧잘 명신(名臣)의 말을 귀담아 들었기 때문에 정치는 대체로 잘 되어 갔다.
여기에는 적인걸(狄仁傑)의 힘이 크게 작용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니만큼 무후도 인걸(仁傑)에게는 「국로 國老)」라는 칭호를 주어 끔찍하게 생각하며 적(狄)이 죽자 소리 높이 울면서 탄식했다고 한다.
인걸(仁傑)은 많은 인재를 끌어올려 무후에게 추천했고 모두 채용되어 각기 재능을 발휘했는데 그 수가 요원숭(姚元崇)등 수십인에 이른다. 다들 인걸(仁傑)을 존경해서 그 문하에 모였다.
이 성황을 본 어느 사람이 반은 부러운 듯 반은 비웃듯 말했다.
「천하의 준재, 명과진보(名果珍寶)가 다 당신의 집에 있군요. 참 대단합니다」
인걸은 정색을 하며 그 잘못을 나무랬다. 현자(賢者)를 주상에게 추천하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다. 나 한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다.
인걸(仁傑)이 중용한 사람 중에 원행충(元行沖)이라는 박학하여 만사에 통효(通曉)한 인재가 있었다. 그 행충이 어느 때 인걸에게 말했다.
「당신의 집에는 진미(珍味)가 많으니 과식해서 탈이 나지 않도록 나 같은 쓰디쓴 약도 두어주시요」 하고 양약은 먹기에는 쓰나 병에는 효험이 있고, 충언은 귀에 거슬려도 행동에 이가 있다는 것을 풍자했던 바 인걸은 파안일소했다.
「천만에, 자네는 나로서 바로 곁에있는 약상자 속의 약과 같다. 때에 따라 도움이 되어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될 아주 중요한 인재라네」 (『十八史略』)
이윽고 무후도 밀어닥치는 나이는 어쩔수가 없어 병상에 눕게 되었다. 장간지는 이 기회를 잡아 군사를 일으켜 양위(讓位)를 강요했고 추천대성(則天大聖)이란 칭호와 맞바꾸어 퇴위시켰는데 중종을 다시 위에 오르게 했다.
여기서 주(周)는 15년으로 종말을 고하고 다시 당(唐)의 세상이 되었으나, 갑자기 쇠약해진 무후는 이 해 83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것은 적인걸이 죽은 후에 생긴 일이다.
2023.10.09 - [중국고전배우기] - 입석시 立石矢 뜻과 유래: 이광(李廣)의 활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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