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예언자 토인비
토인비는 1889년 4월14일 영국에서 태어나 1975년 10월 23일에 세상을 뜬 세계적인 역사학자이다. 그는 삼촌인 경제학자 아놀드 토인비 등 유명한 학자를 배출한 가문에서 태어나 영국사를 전공한 어머니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맨체스터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 후 베일리올 대학(Balliol College)에서 역사학 강의(1912~15), 런던 대학교수(1919~24), 왕립 국제문제 연구소장 (1925∼53)등을 역임 후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57). 그는 베르그송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특히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의 서구 문명설에 대항 기독교 문명의 갱생을 역설하였다.
그는 역사상에 나타난 제 문명의 생성·발전·붕괴의 과정을 비교 연구함으로써 문명 형성의 일반법칙을 체계화했고, 서구 유럽의 위기와 체험을 통해 현대 세계의 구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세계사의 수립을 시도했다. 특히 그의 명성을 높인 《역사의 연구(Study of History vol. 10, 1934~57)》는 문명의 단원적인((modualr) 공론을 인정, 문명의 생태학적 연구와 서구 문명의 위기를 역설한 방대한 문명론이다.
그 외에 주요 저서로 《그리이스의 문명과 성격(Geek Civilization and Character, 1924)》, 《세계와 서구(The World and the West, 1953)》, 《그리이스 사관(史觀·Greek Historical Thought (1924), 《국제문제조사(A Survey of International Affairs(1924~38)》, 《시련에 선 문명(CiviizationTrial(1948)》, 《역사가가 본 종교(An Historians Approach to Religion(1956)》, 《동과 서(East to West a Journey Round the World(1958)》, 《헬레니즘 (Hellenismi; the History of a Civilization(1958)》, 《국민과 전쟁》, 《1920∼23년간의 사적 개관》, 《중국 기행》, 《그리이스 역사에 있어서의 몇 가지 문제》, 《움직이는 도시》등이 있다.
역사 연구가로서의 토인비
토인비는 1911년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약 1년간 아테네 고고학 연구생으로 그리스 각지를 방문했다. 모교의 고대사 학생지도원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여행이었으므로 그 동안 그리스 고전에 대한 지식과 고고학에 대한 지식을 넓힘과 동시에 당시의 국제 문제에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전만 해도 국제 문제에그다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908~1909년 대학 재학 중에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병합을 계기로 발칸 반도의 분쟁이 일어났을 때도, 그 뒤 이 문제의 전문가로서 세상에 알려졌던 그는 그때만 해도 국제 문제에 그만큼 감흥도 이해도 없었다. 역사가는 어떤 계기로 역사연구에 관여하게 되는 것일까? 토인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배경과 소지가 충분히 갖추어져 있어도 거기에는 어떤 계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초의 고대 그리스의 여행에서 고대 그리스의 유적을 방문하는 기회를 가진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같다. 더우기 니이체로부터 〈역사가는 모자를 파는 인부〉라는 말을 들은 바 있는 그는 역사 연구가로서의 위치를 자각하고 그런 욕설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때부터 그 나름대로의 역사관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고전적 역사의 교양이 몸에 밴 그는 그리이에서 돌아온 1912년 어느 날 회색의 조용한 북해(北海) 해안을 산책했을 때 역사적인 지중해가 마치 인류의 고향처럼 그리워짐을 참을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한결같은 고전적 역사 연구가인 토인비의 한 모습을 엿보게 된다. 그는 1912년 아테네에서 돌아와 모교에서 연구원 및 학생지도원으로서 그리스·로마 고대사에 대한 연구와 수업을 맡았다.
토인비의 역사 연구에 대한 구상과 착수
1915년 토인비는 영국 외무성 정보부에 들어가 터키(튀르키에) 관계의 임무를 맡게된다. 그때 그는 이미 두 개의 현대사를 발표하고 있었다. 하나는 1915년에 발표한 《민족과 전쟁》 또 다른 하나는 《두 유럽》이다. 이것은 당시 그가 현대사에 관심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토인비가 역사가로서 본격적인 수업에 착수하게된 것은 세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 강화회의가 개최되어 그가 영국 정부 전문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했을 때부터이다.
이어 역사가로서 토인비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파리 강화회의 후 1925년에 그가 왕립국제문제 연구부장이 되어 1920년 이후의《국제문제분석》을 해마다 한 권씩 공간(公刊)해야 하는 큰일을 주제했을 때부터이다. 그것으로 인해 그는 현대사 연구가로서 전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국제문제분석》의 조사 편집에 종사하면서 토인비는 필생의 대저 《역사의 연구》를 구상하고 그 대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그 최초의 구상은 1925년 정식으로 왕립국제문제연구소에 관계하기 조금 전으로 즉 전쟁이 끝난 1919년에서 1924년 사이이다. 그때 그는 현대사의 움직임과 과거의 역사, 문화와의 관련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1925년 이후 왕립 국제문제 연구소에 관계하면서 현대사 연구가 당면 과제였기 때문인데 그와 동시에 그것이 고대사의 연구와 분별되지 않는다는 그의 인식에 의해서 문명 흥망의 역사인 《역사의 연구》에의 구상이 진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토인비가 현대의 변천하는 국제 문제를 연구하면서 고대 문명에 대한 연구를 병행하여 행한 것은 일견 성공하기 힘든 어려운 사업처럼 생각되었다. 그것은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지만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토인비 자신이 의식적으로 시험한 것 즉 스스로 의도한 결과였다.
《역사의 연구》 10권이 완성될 무렵 토인비 자신이 말한 것처럼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지 않았더라면 아무 것도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토인비는 이 작업을 계속하면서 20세기의 세계 전쟁을 관찰하였다. 토인비의 경우에 있어서 고대와 현대의 병행적인 동시대적 연구는 다시 두 개의 새로운 역사적 사실에 의해 자극되었다. 그 하나는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으로부터 시작되는 혁명적인 세계적 변동이다. 즉 토인비가《역사의 연구》를 완성하기까지의 40년간은 러시아 혁명 기간이다. 파시즘 같은 정치적 혁명이 일어났고 드디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아시아나 태평양에까지 전쟁이 확대되어 미증유의 혁명적인 변화가 행해졌다. 이는 현대의 역사 연구가에게 현대 세계에 관한 새로운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또 하나는 이 새로운 역사가 씌어졌던 시대는 동양학자나 고고학자에 의해서 우리가 이미 잊어버렸던 것, 전통적 유물의 발굴, 역사 연구에 새로운 장(章)을 장식하기에 이르렀다. 예를 들면 미노스 문명, 그리스·로마 문명 밑에 파묻혀 있던 묘(墓)에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였고, 상업 문명은 고대 중국 문명하에서 발굴 되었으며, 인더스 문명은 아리언·인도에서 볼 수 있게 되었고,히타이트 문명은 헤로도토스에 의해 알려진 소아시아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또 동시에 수메르 문명이나 콜룸부스 이전의 신세계에 관한 우리들의 견해는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서 얻어진 새로운 지식에 의해 완전히 변형되고 말았다.
이 현대와 고대의 두 방면에 관한 발견과 연구에 의해 많은 역사적 지식을 얻게 되었고, 5천년에 걸친 인류와 세계의 문명에 관한 시야는 확대되었으며 보다 깊은 곳을 파헤치게 되었다. 호기심은 인간성의 하나의 특징이기도 하며 우리들에게 역사 전체에 대해서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하였다. 이것이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를 시도한 의도였던 것이다.
1930년에 집필하기 시작해서 1957년에 완성한 《역사의 연구》는 그의 필생의 작업이기도 했다. 열 권에 달하는 이 방대한 저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제1권은 〈서론〉이고, 제2권에서 제6권까지는 〈문명의 발생〉, 〈문명의 성장〉, 〈문명의 쇠퇴〉, 〈문명의 해체〉라는 여러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이후 4권은 〈세계국가〉, 〈세계교회〉, 〈영웅시대〉, 〈문명의 공간적 접촉〉, 〈문명의 시간적 접촉〉, 〈역사에 있어서의 법칙과 자유〉, 〈서구문명의 전도〉이다. 이 4권과 6권의 사이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서 전후 다시 저작에 착수하기까지 7~8년 간의 간격이 있고, 그 사이 토인비의 역사관에도 약간 미묘한 변화가 있었지만, 그는 서론에서 밝힌 바와 같은 의도와 방법에 따라 넓은 시야를 가지고 연구에 전념해 나갔다.
토인비는《역사의 연구》 1권을 완성했을 때이렇게 말했다. 「이제 이 저서는 내 뒤에 있다. 아무리 긴 저작이라 해도 한 과제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저작은 끝났지만 과제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그가 그 저작에 몰두하고 있었을 때도 세계 각지에서는 고대 유적의 발굴이 행해졌고 고고학적 지식은 쌓여 갔다. 동시에 위기적인 현대사의 새로운 장(章)이 덧붙여지고 있었다. 이 점을 감안할 때 역사의 과제는 영원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토인비의 역사 이론
토인비의 역사 연구의 특징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역사 연구의 단위를 국민이나 국가에 한하지 않고, 몇 개의 국민이나 국가 또는 지방국가를 포함하는 문명권과 그 사회 체제에 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을 인정하고 그의 역사 연구의 이론적 방법론적 입장을 규명해 보기로 하자. 즉 그의 역사 이론의 핵심으로 보이는 역사에 있어서의 법칙과 자유의 문제이다. 여기에서도 우리들은 그의 독특한 견해를 볼 수 있다. 토인비에 의하면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의 1세기는 서구인 사이에서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진보의 법칙에 대한 신뢰와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에 의해서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자유주의의 확신이었다.
그런데 1914년 이후 20세기 중엽이 지난 오늘날 그 사정은 일변했다. 특히 1918년에 출판된 오스발트 슈펭글러의《서구의 몰락》이 미친 영향은 실로 컸다. 문명에는 통일성과 지속성이 있는 동시에 병행성과 동 시대성도 있고 언제까지고 계속되는 것이 아니나 결국 소장(消長)이 있다는 이론에서 토인비는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물론 토인비의 역사 이론이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이론과 같다고 할 수는 없으나 분명히 그 영향은 인정했다.
그리하여 그의 독특한 견해는 문명의 발생에서 해체에 이르는 역사 과정을 지배하고 있는법칙에 대해서였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법칙이라고 하면 사람이 만든 법칙을 의미하나 여기에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가 의미하는 법칙은 인간 생활을 지배하는 법칙이라는 점에서는 인간이 만든 법률이나 제도와 비슷하나 인간이 만든 것도 아니고 또 사람이 제 마음대로 바꾼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그것과 다르다.
이 법칙의 관념은 한편 상반하는 두 개 개념의 어느 쪽에 속해 있다. 하나는 우주를 지배하는 형이상학적 법칙, 다시 말하면 전능한 〈신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다. 또 하나는 그와 반대로 우주를 지배하는 형이상학적 법칙을 비인격적인 획일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자연의 법칙〉으로 생각했다. 이 두 법칙의 개념에 대한 토인비의 견해의 특징은 통일적으로 조화적으로 생각한 점에 있다. 두 개념 모두 우리들 인간에게 위안을 주는 부분과 공포를 주는 부분을 갖추고 있다.
자연법칙의 두려운 점은 그것을 건드리지 않는일인데 그러나 그것은 언제고 공포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건드려 움직여 보고 싶은 데서 인간의 지적능력이 생겨난다. 즉 자연에 관한 지식은 인간의 지적 능력에 의해서 파악되고 자연을 인간의 목적에 따르게 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현재 원자까지 분열시켰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자연법칙의 냉혹성을 이겨내는 유일한 길은 신의 법칙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지 않고, 벌을 주는 것이 자연법칙의 최후의 심판이나 그것에 이기는 길은 죄를 자각하고 신의 은총에 힘입는 일이다.
토인비의 견해에 따르면 이 신의 법칙과 자연법칙은 언제나 고대 문명과 시리아 문명의 역사적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써 이스라엘과 페르시아의 예언자들의 혼(魂)의 노력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고, 또 후자의 개념을 전형적인 형태로 논술하고 있는 것은 인도 문명 세계와 헬레닉 문명 세계의 해체를 눈앞에 두고 직접 본 철학자들이었다. 이 두 사상은 토인비의 생각으로는 서로 논리적으로 일치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두 종류의 법칙이 동시에 병행하여 활동한다는 것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신의 법칙은 어느 한 사람의 인격적 존재의 이지(理知)와 의지에 의해서 추구되고 유일불변의 목적을 계시한다.
자연법칙은 차륜(wheel)을 중심으로 하여 회전하는 바퀴처럼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운동을 보여 준다. 이러한 자연법칙과 양립한다고 생각된 신의 법칙은 그리스도교 사회와 이스라엘 사회가 서로 유태교로부터 이어받은 유산이며, 현저하게 유사 하면서도 완전히 독립된 두 개의 저작 성(聖) 아우그티스누스의 《신의 나라》와 이븐 할둔의《베르베르 민족》의 서론 속에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근대 후기의 서구인들은 이 신 중심의 역사철학을 버렸다. 그 이유는 이 역사관은 그리스도교에 맞지 않고 또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편 토인비의 역사법칙에 대한 탐구방법은 자연법칙이 문명의 과정에 있는 인간의 역사 속에 뛰어들고 있는가 없는가는 전혀 미지수라는 가정에서 출발했다. 그리하여 갑자기 문명을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와 기능을 분석하는 방법에서부터 시작하여 문명의 생성과정에 있어서의 동인(動因)을 연구한다는 순서를 취했다. 즉 ⓛ 개인의 생활 ② 근대 서구사회의 경제 생활 ③ (지방) 국가간의 싸움-세력 균형 ④ 문명의 해체 ⑤ 문명의 성장이라는 문제점을 취급하였다.
먼저 개인 생활에 있어서의 자연법칙에 대해서 말하면 여기에는 어느 정도의 일반적인 법칙을적용했다. 그 증거로서 토인비가 들고 있는 것은 보험사업의 발달이었다。물론 인간 생활에〈자연법칙〉에 알맞는 증거로서 성급하게 모든 종류의 보험을 들출 필요는 없으나 생명보험에 있어서 생리학이나 의학의 관계, 선박과 선적을 대상으로 하는 해상보험 등은 적어도 그 일부분은 과학의 일부분인 기상학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도난이나 화재보험은 명백히 인간적인 특징인 범죄성이나 주의의 결여에 일반적인 법칙을 적용하여 도박을 하는 것과 같다. 근대 서구의 경제생활에 대해서 말하면 물자의수요·공급의 변동에 관한 통계적 경향이 호경기나 불황의 교체의 형태로 나타남은 주지의 사실이다. 산업화된 서구사회에 있어서 경기순환의 현상은 통계학적으로 확인되기 이전에는 사회현상의 직접적 관찰로부터 경험적으로 발견되었다. 그 후 여러 학자에 의해서 많은 경기 순환론, 즉 일정한 경제법칙이 제창되어 왔으나 거기에는 지금까지 의견의 일치가 없다.
여하튼 경제사의 모태인 자료 속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래 백년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인간 특유의 성질이 인간 활동의 경제 부분을 지배하는 일군(一群)의 법칙을 설정하여 경제 활동을 전개할 수 있게 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와 같이 토인비는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전쟁의 주기적 반복, 문명의 해체에 관한 징후와 원인 등을 일련의 리드미칼한 파동의 틀로 진행하는 것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연구도 거듭했다. 여기에서 토인비는 사회 해체는 세력균형보다도 한층 정확한 규칙적인 원인에 의해서 진행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토인비는 〈자연법칙〉과〈신의 법칙〉이라는 대전제하에서 그의 역사 연구를 전개해 가면서 구제자인 신과의 관계를 수립해 가며 세계사를 파헤치고 있다.
《역사의 연구》를 본격적으로 개시했던 1929년에서 1954년까지 20여년 간에 걸쳐 토인비는 여러 문명의 발생에서 해체에 이르는 연구를 끝마쳤다. 그 동안에 그는 현존하고 있는 문명, 특히 서구 문명의 전도에 대해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그 뒤의 상황을 볼때 1929년 당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던 낙관적인 생각이 근본적으로 오류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가 서구 문명이라고 하는 하나의 문명의 전도에 곤란성을 발견하고 그를 탐구하기에 이른 자극은 서구 사회의 역사를 역사 그것과 동일시하는 근대 후기의 서구인 일반에게 행하여 온 습관에 대한 반항이었다.
이에 자기 중심적인 가정에서 탈락해 가는 방법을 탐구했다. 그 방법을 살피면, 즉 ⓛ 20세기의 제2·4반기에 있어서 해체기의 징후를 나타내지 않는 유일한 현존문명은 서구 문명만이라는 사실 ② 서구 사회의 확대와 서구 문화의 방사에 의해 현존하는 다른 문명과 미개 사회가 모두 세계 전체를 포함하는 서구화의 추세 속에 휘말려 버렸다는 사실. ③ 인류 역사에 있어서 비로소 전 인류가 멸망하는 위험에 직면했다는 사실. 원자 무기와 세균 무기를 사용하는 제3차 대전이 일어나면 인류의 멸망은 물론 세계는 잿더미로 변해 버릴 위험을 안고 있다. 단추 하나로 그러한 살인 무기를 발사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이런 사실이 토인비로 하여금 서구 문명의 위기를 직감하게 하였고, 이에 대한 구제에의 탐구를 20세기 역사 연구의 필요불가결한 부분이라고 결론지었다. 사실 세계는 토인비가 본 바와 같이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로부터 세계를 구제해 내는 것이 인류의 과제이기도 하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기로에서 방황하고 있는 인류 세계 평화에의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진정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토인비의 역사 연구는 그 열쇠를 찾는 하나의 방법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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