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양약고구(良藥苦口)는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뜻으로 진심이런 좋은 충고는 귀에 거슬린다는 의미의 고사성어로 그 유래는 공자가어와 한비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책사 장량이 한고조 유방에게 정신을 차리도록 한 말로 유명하다.
1. 고사성어 양약고구 良藥苦口 뜻과 유래(ft. 출처, 한자 해석, 예시)
1.1 양약고구 良藥苦口 뜻과 한자 해석
良 어질 량(양) 藥 약 약 苦 쓸 고 口 입 구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뜻이다.
1.2 양약고구 良藥苦口 유래
1.2.1 양약고구 良藥苦口 출처
공자가어(孔子家語)와 한비자 韓非子
1.2.2 양약고구 良藥苦口 유래
무관(武關)을 돌파하여 진(秦)의 근거지인 중원(中原)에 제일 먼저 들어간 유방(劉邦)은 패상(覇上)에서 진(秦)의 자영(子嬰)이 바친 제왕의 인(印)을 받고 다시 수도 함양(咸陽)으로 들어갔는데 그것은 기원전 26년의 일이다.
유방은 아직 천하를 통일하지 못했지만 이것이 한(漢)의 원년(元年)이 되었다.
술과 여자를 크게 좋아하는 유방은 장대(壯大)한 진의 아방궁으로 들어가자 화려한 장막, 훌륭한 말, 수많은 재보 거기다 몇 천 명이라는 궁녀에 눈이 어지러워져 나는 여기서 살겠다고 하며 항복한 자영(子嬰)을 죽이자고 했다.
수행장(隨行將)인 번쾌에게 쓸데없는 살인을 하지 말라고 타이르던 유방도 그 아방궁의 매력에는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번쾌가 「하여간 이 궁전에서 나가주십시요」 하고 유방에게 말했다.
그러나 유방은 듣지 않았다. 그것을 알게된 참모인 장량(張良)은 궁전을 유방에게 보인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면서 유방에게로 갔다.
애당초 진(秦)이 도리에 어긋나는 짓만 해서 인심이 떠났기 때문에 주군(主君)께서 이렇듯 진의 영지를 점령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천하를 위해서 적(賊)을 제거한다면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지금 진의 땅으로 들어오자마자 환락(歡樂)에 젖는다면 그야말로 『저 호화로왔던 하(夏)의 걸왕을 도와 잔혹한 짓을 한다』라는 결과가 됩니다.
게다가 『충언(忠言)은 귀에 거슬리나 행실에는 이(利)가 되고, 좋은 약이 입에는 쓰나 병에는 잘듣는다(忠言逆耳利於行 良藥苦口利於病)』이라고 하니 부디 번쾌의 말을 들어주십시요 라고 간청했다.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간 유방은 진(秦)의 창고를 봉인(封印)하고 다시 패상으로 돌아갔으므로 인망(人望)이 오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본디 유방의 경쟁자인 항우(項羽)는 그 조상이 대대로 초(楚)의 장군이고 항(項)이라는 영지(領地)를 가지고 있던 귀족 출신인데 비해 유방은 농민 출신이었다.
그런데 역시 같은 농민 출신인 진승(陳勝)과 같이 실패를 하지 않은 것은 부하가 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부하가 존경해서 따르는 인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젊었을 때의 유방은 진(秦)의 수도 함양에 인부(人夫)로서 징집되었으나 진시황의 거동을 보고 깊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아아, 남자로 태어난 이상 저렇게 되어야 한다」고.
나중에 사수(泗水)라는 시골정장(亭長 - 驛長)이 되어 시황제의 역산능(麗山陵)을 조영(造營) 하기 위해 인부를 호송하게 되었는데 도망자가 속출해서 이래서는 함양으로 가도 죄가 될 뿐이라고 생각한 끝에 밤에 술을 마시고 「여봐 너희들 맘대로 가거라. 나도 도망치겠다」하고 해산을 선언했으나 십여명이 뒤따라 왔다고 한다. 이것이 부하를 거느리게 된 시초였다.
그 후 앞서 봉기(蜂起)해서 세력을 잡은 진승의 명령으로 할당된 장정(壯丁)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을 때 겁을 먹고 있는 고향인 패(沛)의 사람들 대신 수 백명을 이끌고 참가한 것이 거병(擧兵)의 시초로 말하자면 그것은 남을 대신한 후보자였다.
한편 젊었을 때의 항우는 글을 가르쳤지만 가망이 없어 검술을 가르쳤는데 그것도 안돼 숙부 항량(項梁)이 화를 내자 「쓰는 것은 이름만 쓸줄 알면 되고 검술은 한 사람 상대로는 신이 안 난다. 일만명 쯤을 상대로 하고 전술(戰術)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나중에 남방으로 시찰을 온 시황제를 보고 「저따위 녀석이라면 내가 되겠다」고 소리쳐 숙부가 당황해서 입을 틀어막을 정도로 기세가 강한 거인(巨人)이었다.
그리하여 항량(項梁)과 함께 회계(會稽)의 태수를 죽이고 정병 8천을 손에 넣어 말하자면 순조로운 거병을 했다(「선즉제인 先則制人 참조)
그러기에 이제까지의 과정으로서는 유방보다도 항우가 왕자로서 알맞는 길을 걸었다고 볼수 있으나 유방이 행동을 고치기 시작한 것이 이 장량의 충언에서 시작되었다면 장래 그가 왕자다운 내용을 갖추어 가는 것도 이때부터였다.
장량의 충언은 귀에 거슬리기는 하나 유방의 행동에 이(利)롭게 된 것이다.
그럼 이번에는 이 말의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사기 史記』보다도 더 오랜 모습을 남기며 한대(漢代)까지 전해진 고서(古書)의 말을 모았다는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공자가 한 말로서 장량의 말의 순서를 반대로 한 「양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고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실에 이롭다(良藥苦於口而利於病 忠言逆於耳而利於行)」했으므로 이것이 원천 아닌가 한다.
그러나 전세기 전반에 활약한 한비자(韓非子)와 그 학파의 논문집인 『한비자 韓非子』(외저설좌상 外儲說左上)에서는「양약은 입에 쓰나, 지자(知者)는 권해서 이를 마신다. 그는 들어가서 나의 병을 낫게 함을 알기 때문이다. 충언(忠言)은 귀에 거슬리나 명주(明主)는 이를 듣는다. 그것은 공을 이룸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어떤 효력이 있는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자세한 이유를 들고 있다.
이렇게 보면 『韓非子』가 원래의 발상(發想)을 남기고 있는 듯 생각되나 어쨌든 춘추시대말부터 전 3세기 한대(漢代) 초에 걸쳐 정형화(定型化)된 속담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뒷날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조자(助字)인「而」를 버리고「良藥苦口 利於病, 忠言逆耳利於行」이 되고 현대 중국어의 문맥(文脈)으로 들어가서는 어디서나 쓸 수 있도록 「良藥苦口 忠言逆耳」라고 다시 압축시켜 쓰이는 일이 많다.
그래서「양약은 입에 쓰다」라고 말하면 아래의 구「충언은…」의 뜻을 포함하는 것으로, 충언은 듣기 힘드나 실제로는 효험이 있다라는 뜻을 포함시켜 남에게 충고할 경우 등에 쓰이게 되었다.
같은 일을 뒷쪽에서 말한 것이「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鮮矣仁)」이다.
1.3 뉴스 속 양약고구 良藥苦口 사용 예시
- 김동연 '양약고구'(몸에 좋은 약은 쓰다)로 도정 혁신...'레드팀' 출범
- 이세돌과 알파고의 손익계산서…양약고구(良藥苦口·입에 쓴 약이 몸에 좋았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