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Confucius는 중국의 대철학자로 유가(儒家)의 비조(鼻祖)로 성은 공(孔),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공자의 생애와 그의 인 사상을 바탕으로 정치 및 교육 사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자 생애와 인 정치 교육 사상
공자 생애
B.C. 552년에 태어나 B.C. 479 년에 죽은 공자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노(魯)나라 창평향 추읍(昌平鄉 諏邑: 지금의 山東省 曲阜縣) 사람으로 아버지의 이름은 숙량흘 (叔梁紇), 어머니는 안징재(顔徵在)이다.
세살에 아버지를 잃고 집이 빈곤하여 젊어서 위리(委吏)와 승전(乘田)등 관직에 있었다.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침식을 잊고 공부하였으며, 만년에 역(易)을 전심으로 읽어서 위편(韋編)이 세번이나 끊어졌다한다.
배움에 대하여는 하문(下問)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으며 일찌기 (삼인이 같이가면 반드시 나의 스숭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박문강기(博聞强記)하여 고금전적(古今典籍)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학식이 매우 광박하였다.
만 46세 때 정공(定公)이 중도재(中都宰)를 맡겼으며 뒤에 사공(司空) 대사구(大司憲) 벼슬에 올랐다. B.C. 500년에 정공을 도와 제후(齊侯)와 협곡(夾谷)에서 회합할 때 제(齊)로 하여금 노(魯)의 침지(侵地)를 반환케 하였다.
B.C. 496년 56세에 상사(相事)를 섭행(攝行)하여 망신 소정묘(少正卯)를 죽이고 정사를 베풀어 나라를 대치(大治)하였다. 이것을 우려한 제국은 노의 정치를 방해하기 위하여 여악(女樂)을 증진하였다.
계항자(季恒子)가 이것을 받고 3일 동안 조회하지 않으므로 공자는 이것을 구실로 삼아 사직과 노국을 떠나 열국(列國)에 주유하였다.
14년 동안 위(衛)·조(曹)·송(宋)·광(匡)·정(鄭)·진(陳)·채(蔡)·섭 (葉)·초(楚)·제(齊) 등 여러 나라에 다니며 유세(遊說)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 재외하는 동안 적지 않은 곤욕(困辱)을 받기도 하였다.
B.C. 484년 다시 노(魯)국으로 돌아와 도(道)가 행해지지 않은 것을 깨달은 공자는 행림 (杏林)에 단(壇)을 만들고 후진들을 교도하는 한편 저작에 종사하며 요순(堯舜)을 조술(祖述)하고 선왕(先王)의 도를 후세에 전하였다.
그가 제정한 문헌에는 <시(詩)》《서(書)》 《예(禮)》등이 있고 또 노사(魯史)에 의하여 《춘추(春秋)》를 짓고 《주역(周易)》을 연(演) 하여 <효전(孝傳)》을 지었다.
공자의 문인(門人)은 약 3천명이었는데 그 중, 육예(六藝)에 통한 이가 72인이었고, 특히 안회(顔回)·민손(閔損)·염백우 (冉伯牛)·중궁(仲弓)·염유(冉有)·계로(季路)·재아 (宰我)·자공(子貢)·자유 (子游)·자하(子夏)는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 한다.
공자의 도(道)는 그의 생시에는 실행되지 못하였지마는 뒤에 한무제 (漢武帝)의 표창을 거쳐 지금까지 2천 4백여년 동안 중국 사상계를 지배해 왔다.
후세 군주들은 모두 벼슬을 봉하고 왕(王)과 성(聖)이라고 일컬어 지극히 존경하였으며 각지에 공묘(孔廟)를 건설하고 춘추로 향사(享祀, 제사를 지냄)하였으며 그 예(禮)가 매우 존엄하였다.
한국과 일본에도 유교의 큰 영향을 받아 고래로 공묘(孔廟)를 건설하고 석전(釋奠)을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공자의 후예(後裔)는 연문공을 봉하여 대대로 전해 왔고 1912년 혁명이 일어난 후부터 폐지되었다.
공자 인물과 행실
공자는 나면서부터 비범(非凡)하였지만 생지안행 (生知安行)한 사람은 아니고 도(道)를 행하고 수행하여 성인이 된 것이며 "나는 나면서부터 이것을 아는 자가 아니라 옛 것을 좋아하여 민첩히 이것을 구한 자이다(述而)"라고 하였다.
또 학문이 진전한 과정을 말하여 "15세에 배움에 뜻하고, 30세에 서고, 40세에 혹(惑)하지 않고, 50세에 천명(天命)을 알고, 60세에 귀가순(耳順) 하고, 70세에는 마음대로 하고싶은 바를 좇되 법규를 넘지 않았다(爲政)"고 하였으며 또 "사람됨이 발분(發憤)하여 먹을 줄을 모르며 즐겨 근심을 잊어서 늙음이 장차 이름을 알지 못한다(述而)"고 하였다.
이와 같은 호학(好学)의 정신과 실천의 힘은 드디어 박대청심(博大淸深)한 철학을 창조하여 후세에 사법(師法)을 이루었고 또한 후생들을 감분홍기(感奮興起) 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의 생활은 어느 것이나 예술적·위생적이며 또 예에 맞지 않은 것은 없었다.
먼저 음식에 대한 예를 든다면 〈고기가 비록 많으나 밥보다 많이 먹지 않으며, 오직 술은 한량없이 마시되 난(乱)함에 미치지 않았다(鄕黨)〉하며, 언행에 대한 예를 보면 〈공문(公門)에 들어갈 때에는 몸을 국(鞠)하여 용납하지 못하는 듯하며 서기를 문 가운데 하지 않으며 행함에 문지방을 밟지 않으며,임금이 계시던 자리를 지날 때에는 안색을 발연히 변하며 발을 옮기기 어려운 듯이 하며, 말을 해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듯했다(鄕黨)〉한다.
공자의 언행에 관하여는 논어 향당(鄕黨) 편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는데 그는 〈은근하되 엄숙하며, 위엄이 있으되, 사납지 않으며, 공경하되 편안한〉 원만한 성격으로서 1언 1행이 지극히 상식적이면서, 조금도 편협고루(偏狹固陋)함이 없었다.
그러므로 고제(高弟) 안연(顔淵)은 그 스승을 앙모하여 말하되 <부자의 도는 우러러 보면 볼수록 더욱 높고 뚫어 보면 금석과 같이 더욱 굳으며, 이것을 보면 앞에 있는 것 같더니 홀연히 뒤에 있는 것과 같이 황홀하여 포착할수가 없다. 부자는 순순히 잘 사람을 꾀어 나를 넓히기를 글로써 하고, 나를 약하기를 예로써 하였으며, 이제 그만 둘래야 그만둘 수도 없다. 이미 나의 재주는 다한지라 대도가 탁이(卓爾) 하게 자기 앞에 서 있으니 비록 좋고자 하나 쉽사리 따를 수가 없고나〉라고 말하였다.
공자 사상의 근본
공자의 사상의 근본은 철학 · 윤리 · 정치 · 교육 어느 것을 막론하고 모두가 인(仁)에 근거를 두고있다. 인은 온 인류가 몸을 세우고 도를 행하는 총추(總樞)이다.
이 인(仁)은 공자의 근본 사상인 동시에 또한 그의 이상이기도하다.
인(仁)은 공자 자신도 자처하지 않고 경원(敬遠) 하였던 것이며 <성(聖)과 인(仁)은 곧 내 어찌 감히하랴 (述而)〉라 말하였으며, 역대 인물 중에서 인을 허용한 이는 요·순·우(禹)·탕(湯)·문(文)·무(武)·주공(周公) 외에 미자(微子)·기자(箕子)·비간(比干)·백이(伯夷)·숙제(叔齊)·관중(管仲) 등이고 공자의 문제(門弟)중에서 인을 허용한 이는 안희(顔回)뿐이니 희(回)는 그 마음이 석달동안 인(仁)을 어기지 않았거니와 그 나머지는 단 하루나 또는 한달 밖에는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공자는 인의 본질을 말하지 않고 인을 하는 방법만을 말하였으며 그 방법도 일정하지 않고 제자들이 인을 물으면 그 대상 여하에 따라서 대답이 같지 않았다.
번지(樊遲)가 인을 물으면 〈사람을 사랑하라〉하였고, 사마우(司馬牛)가 인을 물으면 〈어진 자는 그 말이 인(認)하다〉하였고 중궁(仲弓)이 인을 물으면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말라〉는 등으로 사회적 개인적인 수양면에서 본 것이지만 인은 광의(廣義)적으로 국가와 사회적인 면도 내포한 것이며, 사회적 정치성을 가짐이 분명하다.
인은 단순한 덕목(德目)이 아니라 사람의 본질 그것이며, 중용(中庸)이나 맹자는 〈인(仁)은 사람이라〉하였으며, 또 인자(仁字)를 보더라도 두 사람으로 성립된 것을 보면 두 사람이 모인 곳에는 벌써 인격 대 인격적인 존재이니 여기에 도덕이 요청된다.
이 인은 공자의 일관의 도로서 증자(曾子)는 이것을 충서(忠恕)라 하였다. 충은 행함에 믿음이 있는 것으로서 수기(修己)에 속하고 서(恕)는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치인(治人)에 속한다. 이와 같이 도덕과 정치를 일환(一環)으로 하여 전 인류가 영원히 평화적 생활을 누리려는 유일한 사상이다
공자 정치사상
공자는 주말(周末) 혼란한 사회를 구제하려면 무엇보다도 명분(名分)을 바르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며, 그의 정치 사상은 정명(正名)·덕치(德治) 주의였다.
노의 대부(大夫) 계강자(季康子)가 정치를 공자에게 물으니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며 (政者正也) 그대가 통솔하기를 바른 것으로써하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으랴(顔淵)〉고 말하였다.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공자의 정치의 정의이다. 정치는 곧 정치(正治)이며, 정도(正道)와 정의로써 백성을 지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정자 자신이 먼저 정도와 정의로써 백성들에게 임하면 백성들도 정도와 정의를 행하게 될 것이며, 이것이 진정한 정치이다. 고로 〈그 몸이 바르면 명령을 하지 않아도 행하고, 그 몸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명령하더라도 좋지 않는다(子路)〉고 하였다.
그러므로 정치와 도덕과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이 공자더러 어째서 정치를 하지 않느냐고 물은즉, 공자는 대답하기를 〈서(書)에 효(孝)라는 것은 오직 효도하며 형제간에 우애 있으면 정치에까지 미치는 것으로써 이것도 또한 정치를 하는 것이니 어찌 정치를 하는 것만을 한다고 하랴(爲政)〉고 하였다.
곧 직접 정계에 나아가서 정치를 하지 않더라도 집에서 효우(孝友)의 도를 다함도 또한 정치가 아니겠느냐는 뜻으로 정치와 도덕을 동일시하였다.
또 제경공(齊景公)이 정치를 물으면 〈임금은 임금 노릇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하며, 어버이는 어버이 노릇하고, 자식은 자식노릇하라 (顔淵) 〉고 말하였다.
군신과 부자는 사회의 중심적인 요소이므로 만일 이들이 자기 가지고 있는 지위와 의무를 다하여 서로 침월하지 않는다면 사회의 질서는 유지될 것이다.
곧 그 지킬 바 의(義)는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그치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그치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孝)에 그치고, 어버이가 되어서는 자(慈)에 그치고, 국인으로 더불어 사귐에는 신(信)에 그친다(大学)〉했고, 정치란 인륜적(人倫的)인 질서를 유지하자는 것이며 이에 법치 (法治)보다는 덕치(德)를 주장하였다.
어쨌든 정치는 바르게 다스리려는 것이며 민심을 바로 잡으려 면 무엇보다도 내성(內省)적인 도덕이 요청됨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공자 교육사상
〈교(敎)가 있으면 유(類)가 없으리라〉란 말이 그의 교육의 신념으로 곧 선천적인 치우(癡愚, 바보) 외에는 어떤 사람이든지 교육에 의하여 덕성(德性)을 완전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제자들을 교회(敎誨)하는데 열성이 대단하였으며 〈속수(束脩)를 행함으로부터 이상은 내 일찌기 가르치지 않음이 없노라 (述而)〉고 말하였다.
곧 일정한 예를 갖추는 이에게는 누구나 다 가르쳤다는 뜻이며, 이에 또한 사도(師道)의 존엄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제자들을 교수할 때에 개성을 중심으로 한 계발(啓發) 교육을 실현하였으며 〈분(憤)하지 않으면 계(啓)하지 않으며, 비(悱)하지 않으면 발(發)하지 않되, 한 모퉁이를 들매 세 모퉁이로써 반하지 못하면 다시 하지 않았다(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則不復也)〉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산파술(産婆術)과도 흡사하여서 이 계발교육은 세계 교육 사상에 있어서 공자를 비조(鼻祖)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 마음 속으로 통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으며, 애태워하지 않으면 말해 주지 않되, 한 귀퉁이를 들어주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나머지 세 귀퉁이를 들어 반증해 오지 못하면 다시 더 일러주지 않는다
그리고 개성을 평한 것을 보면 〈시(柴)는 어리석고 참(參)은 노둔하고 사(師)는 편벽되고 유(由)는 거칠다(先進)〉라고 조금도 숨김없이 솔직히 말하 였으며 또 제자들이 인(仁)을 물으면 그 답이 개인의 성능 여하에 따라 같지 않았다는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세 사람이 행하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며 그 착한 것을 가려서 좋고 착하지 않은 것을 가려서 고친다〉라고 하였으며 이것은 광의적으로 사회 전체를 하나의 교육 도장으로 본 탁견(卓見)이 아닐 수 없다.
그의 교육목적은 성인군자를 양성하려는 것이며 곧 최고의 인격을 완성하려는 데 있다. 군자는 자신만을 수양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수기(修己)를 하여 국가와 사회를 교화해야 한다.
자로(子路)가 군자를 물으니 공자가 대답하되 〈몸 닦기를 경(敬)으로써 하라〉, 〈이와같이 할 뿐입니까〉 가로되, 〈몸을 닦아 사람을 편안하게 하라〉, 〈이와같이 할 뿐입니까〉 가로되, 〈몸을 닦아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함은 요순(堯舜)도 이것을 어렵게 생각하였다(憲問)〉고 말한 것을 보면 성인 군자의 큰 뜻은 항상 천하를 경륜(經倫)하려는 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사명은 필경 여기에 귀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공자의 사상은 철학·윤리·정치·교육을 통합하여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로 동서 사상에서 보기 드문 광대심오한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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