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교근공 遠交近攻는 위여누란이란 고사성어로도 유명한 범수(范睢,또는 범저)의 외교정책으로 먼 나라와는 가깝게 지내고 가까운 나라를 침력한다는 뜻으로 진 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데 지도원리의 역할을 하게된다.
원교근공 遠交近攻 뜻과 유래, 범수(范睢)
원교근공 遠交近攻 뜻과 한자
遠 멀 원 交 사귈 교 近 가까울 근 攻 칠 공
먼 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가까운 나라를 침략한다는 뜻으로 전국시대에 범저(范雎)가 주창한 외교정책이다.
원교근공 遠交近攻 유래와 출처
출처.출전: 『전국책 戰國策』 진하 秦下 소양왕 昭襄王 및 『사기 史記』 범수 范睢·채택열전 蔡澤列傳
위(魏)나라의 책사(策士) 범수(范睢,또는 범저)는 타국과 내통하고 있다는 참언(讒言)으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번 했으나 친구 정안평(鄭安平)의 도움으로 진(秦)의 사신 왕계(王稽)를 따라 진도(秦都) 함양(咸陽)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진왕의 나라는 누란(累卵)보다 위태롭다, 위여누란 危如累卵」라는 솔직한 말을 왕이 좋아하지 않아 잠시 그 뛰어난 변설을 휘두를 기회가 없으나 소양왕(昭襄王) 36년(B.C 271)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가 찾아 들었다.
당시 진(秦)에서는 소양왕의 어머니 선태후(宣太后)의 동생인 양후(穰侯)가 재상 자리를 차지하고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세력을 믿고 제(齊)를 침공해서 자기 영토인 도(陶)의 땅을 확장시키려고 꾀했던 것이다.
이것을 알게된 범수(范睡)는 왕에게 왕계(王稽)를 통해 문서를 제출하고 배알(拜謁)을 청했다.
「인주(人主)는 사랑하는 바를 상주고 미워하는 바를 벌합니다. 명주(明主)는 이와는 달리 상은 반드시 유공(有功)에게 가하고 형(刑)은 반드시 유죄(有罪)에게 내립니다」 로 시작된 일문(一文)은 다행히도 왕의 마음에 들었다.
추천자인 왕계(王稽)에게까지 칭찬하는 말을 할 정도였다. 마침내 사람들을 물리치고 인견(引見)한 후부터는 겸손하고 삼가하면서 가르침을 청하는 것이었다.
범수는 말한다.
「한(韓)·위(魏) 두 나라를 지나 저 강한 제(齊)를 치는 것은 득책(得策)이 아닙니다. 약간의 군사로는 제(齊)가 눈도 깜짝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대군을 출동시키는 것은 진(秦)으로서 좋지 않습니다.
가급적 자국(自國)의 병력을 절약하고 한(韓)과 위(魏)의 병력을 전면적으로 동원하려는 것이 왕의 생각이나 동맹국을 신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남의 나라를 지나서 공략하는 것은 어떨까요.
제(齊)의 민왕(湣王)이 악의(樂毅)에서 패한 원인은 멀리 떨어져 있는 초(楚)를 쳤기 때문에 동맹국의 부담이 지나치게 무거워져서 이반(離反)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읍니다.
득을 본 것은 바로 옆에 있는 한(韓)과 위(魏)로 말하자면 적군에게 군사를 빌려주고 도둑에게 식량을 내준 것과 같은 것, 지금 왕께서 취해야 할 방법으로는 먼나라하고는 서로 사귀고 가까운 나라를 치는 즉 원교근공(遠交近攻)책이 제일입니다.
한치의 땅을 얻으면 왕의 촌토이고 한자의 땅을 얻으면 왕의 한자의 땅이 아닙니까? 이해득실이 이토록 뚜렷한데 멀리 치는 것은 잘못이 아닐까요」
이상은 대략 『전국책(戰國策)』의 「진(秦) 소양왕(昭襄王)」에 의했으나 『사기 史記』의 「범수 채택열전 范唯·蔡澤列傳」의 문장도 거의 같다.
이로부터 범수는 진의 객경(客卿)이 되고 다시 재상에 임명된 다음 응후(應侯)로 봉해져 군사 관계의 일을 도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후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은 진(秦)의 국시(國是)로써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는데 지도원리의 역할을 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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