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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무중 五里霧中 뜻과 유래(ft. 한자, 출처)

지적허영 2023.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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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무중(五里霧中)에서 무(霧)가 안개를 뜻하는 사항을 이해하면 말 그대로 5리에 걸친 안개 속이란 뜻으로 일이나 상황을 알 수 없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하는 고사성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유래는 후한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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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무중 五里霧中(사진 출처: Pixabay)

오리무중 五里霧中 뜻과 유래(ft. 한자, 출처)

오리무중 五里霧中 뜻과 한자

五 다섯 오 里 마을 리(이) 霧 안개 무 中 가운데 중

안개가 5리에 걸쳐 있다는 뜻으로 일의 방향을 잡기 어려울 때 사용한다.

오리무중 五里霧中 유래와 출처

출처.출저: 『후한서 後漢書』 장해전 張覇傳

 

환관(宦官)과 외척이 정치를 손아귀에 넣고 있던 후한(後漢) 화제(和帝) 때 장패(張覇)라는 성도 출신의 학자가 있었다. 화제(和帝)가 병으로 죽은 후 이어서 즉위한 100일도 안된 황제 상제(殤帝)가 즉위 후 8개월만 죽어 안제(安帝)가 즉위했을 때에는 시중(侍中…측근側近의 고문관顧問官)이 자리에 있었다.

 

상제와 안제의 정치 실권은 등태후(鄧太后…和帝의 황후)와 그의 오빠인 등질이 모두 쥐고 있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그 등질이 장패(張覇)의 명성을 듣고 사교를 청해왔을 때 장패는 머뭇거리면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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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무중 五里霧中(사진 출처: Pixabay)

이에 모두들 그의 융통성 없음을 비웃었으나 얼마 후 그는 70세로 병사했다. 한편 장패(張覇)의 아들로 장해(張楷)라는 자가 있었는데 자(字)는 공초(公超)라 하고 역시 『春秋』 『古文尙書』에 능통한 학자로서 문도(門徒)가 언제나 백명이 넘었고 선대부터의 숙유(宿儒, 오랜 경험으로 학식과 명망이 높은 선비)들이 다 문을 두드렸다.

 

항사 거마(車馬)가 길을 메우고 수행자는 금붕어의 똥 모양 끊이지 않았다. 환관이나 황제의 친척들도 그들과 왕래하기를 원했고 또한 애를 썼다. 그러나 그도 그 아버지와 같이 그것을 피해 향리로 돌아가 버렸다.

 

사예(司隸 - 治安局長)가 무재(茂才 - 官吏登用有資格者)로 추천하여 장능(長陵)의 영(令)으로 임명했으나 출사(出仕)하지 않고 홍농산중(弘農山中)에 은거해 버렸다.

 

학자들이 이를 좇아 그 거소(居所)는 항상 저자를 이루었다고 한다. 후에는 화음산(華陰山) 남쪽 기슭에 마침내 공초시(公超市)가 서게 되었다. 이쯤 되면 더욱 더 거용(擧用)하고 싶은 것이 정이다.

 

중신(重臣)들은 몇 번이고 현량방정(賢良方正 - 官吏登用有資格者)으로 추천했으나 역시 사관하지 않았다.

 

안제(安帝)가 죽고 다음에 황제가 된 순제(順帝)는 특히 하남(河南)의 윤(尹)에게 조서를 내려 「장해(張楷)의 행실은 원헌(原憲 - 子思)을 따르고 그 조(操)는 이제夷齊 - 백이숙제 伯夷叔齊)와 같다……」 고 격찬하고 예로써 맞이하게 했으나, 장해는 이때도 병을 이유로 출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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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무중 五里霧中(사진 출처: Pixabay)

그런데 장해는 학문 뿐 아니라 도술(道術)도 즐겨 곧잘 오리무(五里霧)를 만들었다. 즉 방술(方術)로 오리나 계속되는 안개를 일으켰다고 한다.

 

당시 관서 사람으로 배우(裴優)라는 자도 방술(方術)을 써서 삼리(三里)에 걸치는 안개를 일으켰는데 장해가 오리무를 일으킨다는 말을 듣고 그 재주를 배우려고 했으나 장해는 모습을 감추어버려 만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오리무(五里霧)라는 말이 생겼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이란 말은 이「오리무」+「중」으로 처음부터 중(中)이 붙어 있지는 않았다.

 

오리(五里)나 이어지는 짙은 안개 속으로 말려들어가면 동서를 통 알 수 없게 된다. 어떻게 할지 몰라 쩔쩔매게 된다. 그런 뜻으로 쓰이나, 요컨대 사물의 방침에 가망성이 서지 않는다든가, 마음이 어지러워 어찌할 바를 모른다든가 할 때 그것을 비유해서 쓰게 된다.

 

황제가 지남차를 만들어 안개 속에서 방각(方角)을 알고 적을 격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중국에 알맞는 고사(故事)이나 물론 진실은 불명이다.

 

참고삼아 안제(安帝)가 죽고 2살에 즉위한 다음 충제(沖帝)역시 3개월만에 죽어 질제(質帝)가 섰을 때 배우(裴優)가 안개를 일으켜 나쁜 짓을 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는데 장해에게 방술을 배웠다고 해서 장해도 덤으로 1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옥중에서 그는 경전을 읽었고 『尉書』의 주(注)를 만들었다. 후에 사실무근이 밝혀져 석방된 후 질제(質帝) 다음에 즉위한 환제(桓帝)의 건화(建和) 3년, 다시 조서를 내려 초빙했으나 역시 병을 이유로 사과하지 않고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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